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40 후기인상주의: 고흐

AH101 2012. 2. 1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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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Self-Portrait with Felt Hat, Winter 1887-88*

1853 3 30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
농민 하층민 모습과 주변 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무렵의 작품이다. 1886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
렘브란트와 밀레풍()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 2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2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
(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
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
40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Still Life of Shoes, 1886*

고흐는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들이 많다.
작품처럼 낡은 신발을 정물의 소재로 다루었던 화가는 고흐 이전에는 밀레가
있을 뿐이다. 밀레의 서민 감정에 공감을 느꼈던지 그런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고흐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있다. 작품도 밀레의 신발을 그린 데생에 자극
받아서 그린 것이 틀림없으리라. 켤레의 신발은 농부의 생활과 힘겨운
수고의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파리에 나와서도 세련되고 밝은
도시적인 풍물을 그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처럼 이런 신발들을 그려 네덜란드와
파리 양쪽에 살고 있는 그의 마음의 갈등 같은 것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색채가
밝아지고 필치가 잘게 되면서 격렬하여 지고, 배경의 밝은 빛과 어두운 신발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몽마르트르의 술집,1886*

1886 가을 고흐가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도착한 년만에 그려진 몽마르트
술집은, 당시 빈센트가 몽마르트르를 소재로그린 많은 풍경들 중에서도 매우 뛰어
작품이다. 특히 구도와 화법은 이미 향후의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낮잠> 등을 비롯한 작품들이 보여주게 빈센트 고유의 화법을
그대로 예시하고 있다. 자신의 일상 주변을 소재로 , 근경도 원경도 아닌 시점,
풍경과 인물에 대한 즉각적인, 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인상, 그리고 강렬한 터치는
인상주의와 동시에 사실주의를 추구한 빈센트 고유의 화법을 부족함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자화상, 1887*

고흐는 1885년부터 그가 자살한 1890년까지 37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은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던 고흐의 궁핍한 형편 때문
이기도 했지만, 자화상이 고흐 자신을 확인하는 특별한 의미였기 때문이다.
한결 같은 포즈로 거울을 응시한 그려진 고흐의 자화상들은 그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였음을 보여준다.
자화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고흐의 주최할 없는 열정, 평탄치 못한 고단했던
그의 삶의 궤적을 좇을 있다. 작품은 파리 시대를 마감할 즈음인 1887년경에
그려졌다. 어두운 배경 속에 노란 황금빛으로 빛나는 고흐의 얼굴이 유난히 돋보인다.
매끈하고 섬세하게 채색된 전통적인 인물화와 달리 방향성 있는 짧은 붓질이 전면을
메우고 있다. 머리카락과 수염의 묘사에서 보여지는 짧은 붓질의 독특한 질감과 노란
색과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 등의 원색의 병치는 인물의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 대한
무언의 메시지이다. 고흐의 자화상은 이렇듯 작가의 심리 상태가 표출되는 표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탕기 아저씨,1887*

*The Italian Woman, 1887*

1887 겨울에 그려진 그림 역시 <탕기 아저씨> 마찬가지로 파리 시기를
마감하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립하기 시작한 과도기의 성격을 보여준다.
작품의 모델이 이탈리아 여인은 카페 탐부랭(Le Tambourin) 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rori)이다. 그녀는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카페에서 일본 판화전을 열기도 하였다. 들라크루아로부터 야수파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인 여성의 주제는 화가의 도피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였다.
여인의 얼굴은 본래의 얼굴 대신에 화가의 주관적인 색채가 가해져, 마치 마스크
보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고흐는 작품에서 <탕기 아저씨>에서 보여주
었던 일본 판화 대신 배경 전면에 노란색을 대담하게 칠하였다. 단조로아 보일
있는 화면은 오른쪽으로 각이 장식과 의자 등받이가 보여주는 시각적 균형
덕분에 리듬감을 얻었다. 원피스의 빨간색과 초록색을 비롯한 다양한 색깔들이
노란색 배경 덕분에 더욱 화려하게 느껴진다. 또한 화면에 띠를 두른 빨간색과
초록색 줄무늬의 보색 대비 역시 원피스와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강렬한 색채들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Self-Portrait as an Artist, 1887-88*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1887*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아를르로 조금이라도 태양에 가까이
접근하려고 따라간 셈이다. 그의 이러한 태양에 대한 집념은 해바라기를 닮은 것이라
있다. 해바라기의 형상이나 색채, 그리고 해를 향한 성질은 고흐의 내면적
원형이라 있고, 또한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묘한 톤의 파란색을 배경으로, 강렬한 변화의 노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해바라기>
고흐가 동생에게 말했듯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로 인해 태양에
대한, 또한 생명에 대한 찬가를 부르고 있는 같다. 그는 자신의 강렬한 생명력을
해바라기를 통해 것이다. 1886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해바라기는 처음에는 송이
시작했다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인 1887년에는 송이로 수가 늘어난다.
흥미로운 것은 파리 시기에 그려진 해바라기들이 꽃병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잘려진 바닥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해바라기들의 모습은 절규
하는 고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888 여름 아를르에서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점의 해바라기를 동시에 작업한다. 그리고 하나를 추가해, 점의 대형
해바라기 그림을 고갱이 머물 방에 걸어 놓는다.
<다섯 송이 해바라기> 2 대전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점만 남아
있다. 1889 1 고흐는 새로 점의 해바라기를 그리는데, 점을 같은
11 브뤼셀에서 열린 20 전에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Entrance to the Public Garden in Arles, 1888*

*The Harvest, June 1888*

*La Mousme, July 1888*

*집배원 룰랭, 1888*

고흐는 아를에서 약간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조롱 속에서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제작의
틈바구니에서 한가롭게 밤의 카페에서 차츰 가까이 있는 친구들을 만들어
갔다. '금빛을 장식한 푸른 제복을 입고, 수염을 길러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보이는 우편
배달부' 루랭은 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영속적(永續的) 우정을 갖게 되었다.
특히 루랭의 가족 전체와 친분이 두터워, 아들 아르망의 초상도 그렸고 부인도 그렸다.

*Portrait of an Old Peasant, August 1888*

고흐는 누에넹 시대에 많은 농부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남겼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를 시대에는 농부 사람만을 그렸다. 그가 농부들의 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농부와 개별적으로 가까이 지낼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노농부는 파시앙스 에스카리에라는 이름의 카마르
출신의 농부로서, 고흐는 번에 걸쳐 그의 초상을 그렸다. 다른 하나는 반신상
으로 손은 그리지 않았다. 적어도 아를 시대의 그는 생의 공감자로서 농부를 응시
하는 태도가 아니라 색채나 빛에 대한 조형적 흥미의 대상으로서 더욱 인간적 흥미
북돋우어 갔다. 작품에 있어서도 상부의 강렬한 노란색과 빨간색, 하부의
대비적인 푸른 , 억센 필치 등의 조형적 시도로써 농부를 그리고 있음을 분명
하게 느낄 수가 있다.

*Drawbridge with Carriage(아를의 도개교), March 1888*

고흐가 아를에서 발견한 중에서 가장 그의 집념을 불러일으킨 모티브 중의
하나가 도개교이다. 아를에서 부크에 이르는 운하에 놓여 있는 다리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있는 이런 다리에 대한 향수를 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킨 것이다. 네덜란드에 비하면 밝은 광선에 맑고 푸른 하늘과 물에 둘러싸인
굵고 가는 선의 결구(結構) 이루어진 단순한 모양의 다리의 조형은 그의 표현
의도에 알맞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아를르의 무도회장,1888*

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르에 도착한 것은 1888 2월이었다.
남프랑스의 강렬한 햇살에 감명을 받은 고흐는 곳에서 그의 가장 알려진
작품 점을 그렸다. 그가 아를르에 체류한 얼마 안되어서 고흐는
고갱에게 함께 작업을 하자고 초대했고, 고흐는 고갱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작품은 당시 고갱에게 받은 영향 또한 고갱을 통해 알게 고갱의 제자인
에밀 베르나르의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갱은 종합주의적인 스타일로
그려진 베르나르의 걸작 <브아 다무르의 마들렌느> 고흐에게 보여준
있었다.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는 작품에서 시골 농부 여인들의
형태는 다소 눈에 거슬리는 검은 선으로 둘러쳐져 있고 생경한 초록색 배경
에서 검은 선들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베르나르의 그림을 복제하여 가지고 있던 고흐는, 작품 속에서 몇몇 기술
적인 요소들을 빌려와 작품에 시도한 듯하다. 형태를 분명하게 구획 짓는
윤곽선, 인상주의자들의 분절된 터치와는 반대로 두껍고 납작하게 발라진 색채,
화면 전체에 고르지 않게 그려진 여인들의 실루엣 등은 분명히 베르나르의 그림
연상시키는 조형 요소들이다. 작품은 고흐가 추상으로 향하는 언저리
에서 보여준 실험적인 작품 점이라고 있다. 그러나 인물의 얼굴
모습이 캐리커쳐에 버금가게 일그러져 있을 정도로 그림에 역시 고흐 특유의
기질이 예외 없이 녹아들어 있다. 같은 시기 쇠라와 로트렉 역시 이런 종류의
주제, 댄스홀과 같은 대중의 문화를 화폭에 담았다.

*아를르의 고흐의 , 1888*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 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작품은 그의 조형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흐는 1888 5월에 아를의 가까운 라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집이었다. 바깥은 노랑,
속은 흰색으로 되어 방과 작은 개를 갖춘 조그만 집을 빌린 5월에
바로 이사들지 못한 것은 동생 테오가 가구에 너무 비용이 들까 걱정했기 때문
이었다.

*밤의 카페, 1888*

위안을 찾아다니는 올빼미족, 떠돌이, 예술가들의 장소인 카페를 비스듬하게
놓인 당구대가 채우고 있다. 상의를 입은 카페의 주인은 인공조명에 의해
강조된 밝은 색채들 사이에서 시각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고흐의 이와 같은 작품들
이후의 표현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가스등의 진한 노란색과 밤하늘의 파란색은 차양과 카페 벽의 초록색으로 인해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를 묘사한 그림은 노랑과 파랑,
그리고 색의 혼합색인 녹색이 중심을 이루는 그림이다. 원근법의 구조를 따른
화면은 혼합색의 강렬한 대비를 더욱 강조하며, 그림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은 소실점 끝에 자리잡지 않고, 놀랍게도 앞으로 도출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카페는 예술가들의 집합 장소였고, 말의 잔치가 벌어지는
토론장이었으며, 압셍트 주를 마시는 주정꾼들의 타락과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카페가 본격적으로 묘사되며 회화의 주제로 자리잡은 것은 인상주의 시기에
들어와서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상적 삶의 공간들이 회화의 대상이
것이다. <밤의 카페 테라스> 그리며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밤의 정경이나 밤의 효과를 현장에서 그려내는 , 걸음
나아가서 자체를 그리는 , 이것이 현재 내가 갖는 흥미의 중심이다."
고흐의 밤의 풍경에 대한 열정은 인상파적인 흥미에서 로드렉이나 드가가
밤의 광선에 열을 올린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타는 듯한 정신의 낮을 향했
고흐의 눈이, 마음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것이다. 그에게 " 그리는가?" 라는 문제는 바로 " 사는가?" 문제였던
이다.

* 강의 별이 빛나는 ,1888*

고흐가 태어나기 , 같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빈센트 고흐. 그는 죽은 형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이름과 존재 사이의
혼란과 혼란의 중심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만 했다. 아를르에 도착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타라스콩이나 루안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없다" 말을 한다.
1888
2 아를르에 도착한 고흐는 밤의 아름다움을 그리려고 번이나 마음
먹었으나, 정작 그가 겨우 밤의 테마에 착수한 것은 9월이 되고서였다.
아를르의 밤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9월이었고 고흐는 촛불을 그의 모자 위에
세우고 경치를 그린다. 사람의 연인을 전경에 두고 국화꽃이 활짝 피듯, 푸른
하늘에는 반짝거리는 별들이 가득하며, 강물에 비친 그림자가 길게 리듬을 그리는
폭의 야상곡은 고흐의 정서를 나타낸다. 고흐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하나하나
고유의 색깔이 있다고 보았으며, 별이 있음으로 해서 밤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황홀한 빛의 향연장이라고 본다. 강렬한 색채와 강한 터치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회화상의 규칙을 무시한 파격적인 그림이지만, 당시 고흐 스스로 "명암과
색채를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의 조화를 잃지
않았다.

*The Old Mill, 1888*

*Sower with Setting Sun, 1888*

*Gauguin's Chair with Books and Candle, December 1888*

고흐의 ' 자른 사건' 고흐는 그대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 파리
돌아가 남프랑스의 아틀리에의 꿈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겨우 동안 지속된
공동생활의 추억으로는 사람이 그린 점의 훌륭한 작품만이 남아 있다.
그동안 고갱은 여러번이나 고흐의 모습을 그렸지만, 묘하게도 고흐는 고갱의 모습을
번도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 자른 사건' 일어나기 며칠 , 사람의 헤어짐
가까웠음을 예감한 고흐는 <고갱의 의자>라는 이상한 작품을 그렸다.
그것은 아를에서 고갱이 애용하던 팔걸이의자 하나를 동그마니 화면에 그려 놓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작품인데, 의자 위에는 고갱이 좋아하던 소설책과 켜진 양초 자루
놓여 있고 어두운 녹색과 어두운 빨간 색의 색조가 거의 귀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불길한 박력을 화면에 부여하고 있다. 나중에 고흐는 자신이 비평가인 오리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어두운 색조와 양초로 고갱의 부재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결국 화면의 진짜 주제는 거기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래 거기에 있어야 고갱이
,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흐가 그린 고갱의 유일한 초상이었다고 있다.

*La Berceuse(Augustine Roulin), January/March 1889*

우편 배달부 루랭의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빨강, 노랑, 초록 고호의 기본적인 색채
관계를 나타내는 보다 전형적인 작품이다.

*Joseph-Etienne Roulin, 1889*

*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귀를 자른 자화상), 1889*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비극이 1888 크리스마스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 1 7 퇴원을 고흐는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나 바그너, 베를리오즈의 마음속
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흐 자신은 말하고 있다.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 피해 망상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Self-portrait with a Pipe, December 1888-May 1889*

* 레미의 정신병원, 1889*

Tree and Man(in front of the Asylum of Saint-Paul, St. Remy)

고흐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아를르를 찾은 것은 1888 2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파리에 2 남짓 머물며 200 점의 그림을 그린 후였다.
아를르에 도착한 고흐는 호텔 식당인 카렐 호텔에 머물며 견디기 힘든 겨울을
넘기고, 꽃피는 봄이 되자 아를르의 전원으로 나가 과수원 등의 풍경을 일본풍
테크닉과 구도를 이용해 그렸다. 5월이 되자 유명한 노란 이층으로 세를
얻어들어 고흐는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게 되었고,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아
고갱을 아를르로 부른다. 고갱이 아를로 내려와 고흐와 함께 생활을 1889
말의 달은 12 23 고갱과의 논쟁이 끝난 직후 그를 살해하려 했다가 실패
하고 대신 자신의 귀을 자르고, 자른 귀를 신문지에 창녀 라셀에게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실제 사건으로 붉은 머리의 광인으로
불리게 고흐는 아를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끝에 마침내 마을에서 쫓겨나,
5
월에 아를르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레미의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거듭되는 착란과 망상은 발작으로 이어졌고, 당시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비극
드라마들을 증언하고 있다. 레미의 정신병원 역시 당시의 비극을 증언
하는 그림들 중의 하나다. 고흐는 다음 파리로 올라와 인근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사는 가셰 박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달여 만에 목숨을 끓고 만다.
착란 상태에서 번씩 독성이 강한 물감을 마시는 바람에 그림을 그릴 없게
고흐였지만, 1889 가을과 겨울 고흐는 레미 정신병원의 실내와 정원을
그릴 있었다. 단순한 위안이나 탈출구가 아니라, 당시 그림은 삶과 죽음, 혹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에서 존재 전체를 지탱해 주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그림 왼쪽에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는 이미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고, 뒤의
건물들과 위의 하늘도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었다. 모든 사물은 두터운 외관
벗어버리고,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힘으로 충만해 있다. 나무와 집과 하늘,
그리고 땅과 인간마저 하나의 움직임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은, 종종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무서운 힘으로 약동하며 이성을 마비시킨다.

*The Courtyard of the Hospital in Arles, 1889*

*Field with Poppies, 1889

*Olive Trees with the Alpilles in the Background, 1889*

*Olive Trees with Yellow Sky and Sun, 1889*

*별이 빛나는 , 1889*

1889 6 프로방스 인근의 레미 요양원에 있던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며, 인근의 숲과 전원으로 나가 많은 풍경화를 그린다.
곳에서 그의 그림은 아를르 시대에 비하여 한층 침잠된 색채를 쓰고, 필치는 보다
동적이며, 곡선의 자유로운 발전에 의해서 일종의 묵시록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낸다.
고흐가 몽상적이거나 환상적이라는 것은 아를르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는 표면
적인 흔적을 찾아볼 없었다. 레미에 와서 그의 작업은 본질적인 서정성을
보이며, 몽상가로서의 고흐를 낳게 한다. 그림의 종탑의 모양으로 보아 프로
방스 지방의 작은 마을보다도 조국 네덜란드를 닮은 듯한 마을을 그려 보이고
있다. 북쪽 조국을 그린 그림은 북부 출신인 고갱이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고흐와 함께 작업할 그렸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몽상인 것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그림에 대한 편지를 썼다. "마침내 나는 올리브 나무가 있는
풍경과 별이 빛나는 하늘을 소재로 새로운 습작을 그렸다. 요즘 고갱과 베르나르의
최근의 작품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네게 말한 나의 습작들이 그들의 그림과 비슷
느낌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한다."
별들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모든 것이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된 움직임을 나타내는
장대한 밤의 그림은,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닿는 듯한 서정성과 신비감을 나타내
있다.

*자화상, 1889*

고흐는 앙베르 시절 때부터 40 점의 자화상을 그렸고, 안에서 심도 깊은 닮음을
추구해 왔다. 고흐에게 자화상은 자기 자신과의 대면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고유한
이미지에 대한 일련의 유채였으며 때에 따라 의도적으로 자기의 특징을 바꿔 가며
강조하기도 한다. 누이 윌에게 "동일한 인물이 아주 다른 형태로 나타날 있다"
말한 것처럼, 스스로를 캔버스 앞에 화가로, 낭만적인 북유럽 사람으로, 짧은
머리를 일본인처럼 그리면서 인물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표출하고 있다.
1888
겨울부터 1890 자살에 이르기까지 고흐는 간혹 회복을 보이기도 했으나,
격심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만성적인 환자였다. 1889 7월에 레미 요양소에서
6
주를 번째 발작에서 회복된 고흐는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번째 그림은 요양소 측에서 그의 작업을 중지시키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이었고, 번째 그린 작품은 확고한 결심과 동시에 자기 반성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 거칠고 붉은 수염, 움푹 파인 , 창백한 입술, 모든 것이 화가의 진짜
얼굴이다. 그의 얼굴은 충분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소용돌이치는 배경의
선은 형체를 와해시키며,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물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흐의 자세와 옷차림은 차분하고 고요한 안정을
드러내지만, 혼란스러운 배경은 안정이 위태로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La chambre de Van Gogh a Arles(Van Gogh's Room at Arles), September 1889*

얼른 보기에 아무런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침실이다.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 튼튼하지만 허름한 침대, 아무 꾸밈도 없는 투박한 의자 , 물이 담긴
플라스크와 세면 도구가 놓인 테이블, 옆의 벽에 걸린 수건, 조금 열린 창과
옆에 걸린 거울, 침대 머리맡에 놓인 양복걸이, 그리고 아무 장식도 없는 벌거숭이
방에 약간의 흥취를 더해 주는 벽의 그림. 이런 식으로 구석부터 차례차례 헤아려
보아도 이상 것이 없을 만큼 간소한 방안이다. 작품은 1888 아를에서
그린 원본을 토대로 1889 점의 복사본을 제작하는데, 하나이다.
1888
고흐가 <아를의 침실> 그릴 무렵 고흐는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프랑스 남부의 밝은 태양을 그리며 아를로 왔을 고흐는 원대한 계획
품고 있었다. 아니, 계획이라기보다 오히려 꿈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파리의 화가 친구들을 아를로 불러 모아 공동생활을 하면서 함께 작품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꿈과 같은 계획을 진지하게 생각한 고흐는 아를에 도착하자
아틀리에를 구해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라고 이름 짓고는 파리에 사는 친구들에게
공동생활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고흐의 열렬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름에 응해 아를로 친구는 고갱 사람뿐이었다.
고갱은 고흐가 파리에 있을 때부터 깊이 존경하던 친구였을 뿐더러 만약 고갱마저
오지 않았으면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꿈은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셈이었므로, 고흐
얼마나 친구가 오기를 고대했을지 쉽게 상상할 있다.
더구나 그려진 제재는 사람이 함께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고흐 자신의 침실
이다. 고흐의 마음속에는 이제부터 시작될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고갱에게 알려 주려
생각으로 <아를의 침실> 그렸을 것이다.

*Trees in the Asylum Garden, 1889*

*Wheat Field, 1889*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낮잠, 1890*

작품 <낮잠> 1858년부터 제작된 밀레의 <일터로 떠나는 아침>, <낮잠>,
<
일과의 >, <밤샘> 등으로 이루어진 <하루의 일과> 연작 , <낮잠>
고흐가 모사한 것이다. 브라반트 지방에서 고흐는 농촌 생활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 쿠에스메스에서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을 함께 했듯이, 농부들을
그린다는 것은 "그들처럼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들 명이 되기라도
생활하는 "이라고 생각했다. 고흐는 대지에 뿌리내린 인간들에게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바르비종화파의 거장들과 밀레의 교훈적인 작품을
모델로 삼았다. 그는 일하고 있는 농부들을 그리기를 원했고, 근대 미술의 핵심은
바로 그런 소재에 있다고 본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삽질하는 사람들, 뿌리는
사람들, 수확하는 사람들이 각각 삽질하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있을 뿐이다.
고흐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그림들을 경멸했고, 그의 자연주의는 밀레의
전형적인 인물들보다 훨씬 거칠게 나타난다. 작품에서 하늘의 진한 푸른색과
황색의 밀밭이 자아내는 대비는 밀레의 그림에서는 찾아 없는 요소이고,
노적가리와 우마차도 밀레가 묘사한 것보다 훨씬 뚜렷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림의 밀밭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며, 햇빛에 일렁이는 밀밭과 푸른 하늘은
면으로만 존재할 공간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있다.

*Morning, Leaving for Work(Le matin, le depart au travail), 1890

일터로 떠나는 아침

*The White House at Night(La maison blanche au nuit), 1890*

*Irises, 1890*

*Village Street in Auvers, May 1890*

*Road with Cypress and Star, May 1890*

"창에는 오렌지색의 불빛이 비치는 낡은 여인숙, 높이 뻗어 오른 그루의 측백나무가
똑바로 검게 있다. 길에는 하얀 말에 끌리는 노란 수레 대와 앞을 산보하는
나그네. 굉장히 로맨틱하지만, 이것이 프로방스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고갱에게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히 쓰고 있지만, 편지는
미완성인 나중에 유품 중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측백나무를 그린 작품 특히 유명
것으로서 , 측백나무, 보리밭, 마차, 오두막집 , 생레미 시대의 요소를 대부분
여기에 갖추어 넣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측백나무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
답다.' 하고 있다. 검은 맛의 초록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마음을 쏟았다.
더구나 그것을 밤의 효과 속에서 그리기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은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L'eglise d'Auvers-sur-Oise(The Church at Auvers-sur-Oise), June 1890

1890 6월에 고흐는 누이 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나는 마을 교회를 다룬 커다란 그림을 완성했어. 건물은 코발트 블루로 단조롭게
처리된 하늘을 배경으로 보랏빛이 나고, 반투명한 창문들은 군청색 자국처럼 보이지.
지붕은 보랏빛인데 부분적으로 오렌지색을 띠고 있는 그림이야. 전면에 꽃이 약간
푸르스름하고, 장밋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보이고, 색채는 좀더 표현적이고 화려해."
뤽상부르 미술관에 있는 밀레의 <그레빌의 교회> 참조했던 작품은 고흐가 후기에
그린 90 점의 그림들 가장 특징적인 작품 하나이다.
화면의 뒤에 보여지는 교회의 생기있는 실루엣은 신비스러운 열정을 내부에 담은 ,
강렬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하늘로 인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실루엣은 번째 면의 생생한 작은 터치들로 강조되면서 화폭의 모든 에너지를 극도
고양시키고 있다. 왼편에 급급하게 크로키된 듯한 농촌 여인은 우연성의 상징을 드러
내고, 버팀벽에서 종탑에 이르기까지의 데생은 구불구불한 반향을 남기고 있다.
1951
국가 수집품으로 파리 인상파 미술관에 소장된 앙드레 말로는 작품에
"광기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지탱하고 있던 믿음은
다수의 열정과 동일한 것이다" 라며 경의를 표한다.

* 소녀,1890*

* 가셰 박사, 1890*

1890 5 21 고흐는 파리에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오베르 쉬르 와즈에 도착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가셰 박사는 고흐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해,
그의 의사이자 친구가 되었고, 자진해서 그의 모델이 된다. 화가라는 직업을 두고
고흐가 가장 열광했던 것은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적인 초상화였다.
고흐는 세기 후의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이는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다며, 색채로서
초상화를 탐구한다. 고흐가 오베르에서 초상화를 그릴 가셰는 예순 살이었다.
그는 유사 요법 전문가였고, 고흐는 의사가 손에 "폭스글로브"라는 약초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갈색 , 노란 , 연한 색채 등으로 모자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역동적
붓질로 생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다갈색의 머리카락, 군청색 고양된 색을 통해
가셰의 열정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단조롭게 채색된 캔버스의 파란색 바탕은
<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마찬가지로 달라붙어 있는 같이 보이고 있다.

*코르드빌의 초가, 1890*

1890 오베르에 머물고 있던 고흐는, 풍경화를 비롯해 가깝게 교류하던 사람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2 동안 수십 점의 그림을 그렸다. 견고한 구성과 힘있는
고흐 특유의 기법이 드러나 있는 작품은 오베르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도 수작
으로 손꼽힌다. 고흐는 오베르에 도착하자마자 테오에게 5 21일자 편지에서
"
곳은 무척 아름답다. 지금은 보기 드문 초가집들이 눈길을 끄는구나"라고 오베르
첫인상을 적고 있다. 그가 이채롭다고 했던 낡은 초가집을 담고 있는 그림은
오베르 시기의 주요한 특징을 모두 담고 있다. 요동치는 붓질, 주로 올리브빛을
녹색과 파란색을 사용하면서 부분적으로 검은색으로 윤곽을 지은 등은 시기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작품의 제목인 <코르드빌의 초가> 후에 가셰 박사의 아들에
의해 바뀐 것으로, 본래 제목은 <몽셀의 초가> 전해진다. 코르드빌은 오베르에
위치한 시골 농가들이 모여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Wheat Field Under Threatening Skies(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고흐의 극적이면서도 불안한 삶을
예고하고 있다. 그해 7 고흐는 여기에 보이는 밀밭 언저리에서 자살했다.
자살하기 전까지 고흐는 창작에 대한 열의에 불타 맹렬한 속도로 작업을 해나갔는데,
이것이 그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최소한의 붓질로 거칠게 그린 왜곡된
풍경과 불길한 검정까마귀가 고흐를 자살로 이끌었던 강한 심리적 혼란을 암시하고
있다. 물감은 섞거나 타지 않았으며 각각의 붓질은 신중하고 매우 분명하다.
밝은 노란색 밀과 갈색 토양, 흐릿하고 어두운 푸른색의 하늘빛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거친 선들에 의해 더욱 두드러지고, 고전적인 조화, 정교한 색조가 없어지면서
더더욱 강조된다. 단순한 밀밭은 완전히 변형되어 작가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반영하고
있고, 외부 세계의 현실은 모호하게 재현되어 있을 따름이다.
유사한 주제를 다룬 초기 작품들과 달리 여기에서 밀밭은 햇빛에 대한 인상을 담고 있지
않다. 극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는 불길하게 주변을 선회하는 까마귀와 따로 있는 듯한
격렬한 붓질에 의해 강조된다. 하늘에 보이는 소용돌이는 고흐의 환상적인 풍경
연상시킨다. 작품에서 고흐는 결코 자신의 기술적인 미숙함을 숨기지 않았다.
전통적인 기준에 따라 그의 작품을 평가하려 든다면, 밭을 관통하는 길에 나타나는 급격
원근법 많은 심각한 실수들를 지적할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흐는 원근법 같은 가장 자명한 법칙까지 무시하고 강렬한 표현에만 집중했다.
또한 덧칠한 붓질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어 하나씩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회화 양식은 20세기 미술, 특히 표현주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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