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19 신고전주의: 앵그르

   

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Selfportrait, 1858


David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 완성자라고 있다.
앵그르는 프랑스 남서부 몽토방 출생으로 무명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7
파리로 가서 다비드의 사사를 받게 된다. 앵그르가 화단에 입문하던
무렵의 프랑스 회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삼는 고전주의가 성행했다.
이같은 시대적인 배경과 맞물려 앵그르는 신고전주의 화풍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고, 다비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앵그르가 그린 고전적인 주제들은 다비드의 도상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완벽한 뎃생력과 감성을 갖춘 화가로서 다비드에게 결여되어 있는
'
우아함'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여인들의 초상이나 나체를 통해
드러나는 명쾌한 형태와 우아한 자태는 그만이 가질 있었던 독특한 표현의
영역이었다. 앵그르의 예술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정확한 소묘를 바탕으로
비례와 균형, 조화라는 고전적인 원칙들이 우아한 형태로 캔버스에 담겨
짐으로써, 고전파의 완성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소묘부분에서 앵그르는
미술의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소묘가 채색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
했던 그는 섬세한 , 풍부한 양감과 균형 잡힌 인체 구도의 신고전주의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해 나간다. 그는 다비드가 갖고 있던 정치성을 지워버리고
철저한 미의 구현에 매진하게 된다. 바로크 선상에서 이어진 푸생적 미의
계승자로서 루벤스 정신의 계승인 낭만주의에 맞선 마지막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앵그르의 작품 주제에 있어서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넘나들고 있다. 그가 지닌 고전주의적인 성향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공간의
연결과 조합, 투명하고 분리된 빛의 광선을 이용한 풍부한 리듬감 낭만주의
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따라서 신고전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게 비난과 눈총도
받아야 했고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낭만주의나, 혹은 신고전주의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일면을 토로하기도 한다.
"
() 공부하게. 그러면 자네는 훌륭한 화가가 것이야."
청년 드가에게 앵그르는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앵그르의 이러한
회화적 정신은 우선 드가에 의해 계승되었고, 인상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들라크르와가 색채에 의해서였다면, 앵그르는 형태에 의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었다. 형태에 대한 앵그르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본인의 진술에 나타나 있다. "진실에 의해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발견하지
않으면 된다. 고전은 창작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모델에 대해서는 크기의 관계를 살펴보라. 거기에는 전체의 성격이 있다.
또는 형태는 단순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힘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할하면 할수록 그만큼 아름다움에 약해진다. 사람들은 성격을
잡아내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의 형태 대신에 개의 작은
형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화가들이 그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완벽한 기교를 부러워하고 그의 권위를 존중했다.
역사화는 앵그르의 평생의 염원이었다. 초상화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실상 최후의 위대한 초상화가였다.
그만큼 내면적인 깊이와 외면의 정확성을 통일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제자들은 외관의 정확성에만 매달렸고 낭만주의자들의 그림은 화가의
사적인 감정이 이입되어 관심과 감동을 주는 반면 엄밀한 의미의 초상화는
아닌 것이다. 앵그르의 초상화는 외적 정확성 뿐만 아니라 모델의 내면적
깊이를 끌어내어 조합한다는 있었다. 이때문에 그를 신고전주의의
완성자라 부르면서도 낭만주의와의 절충주의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44세가 되던 유학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성숙되게 하는
중요한 토양이 된다. 그가 프랑스의 다른 고전파 화가들과 다른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의 고전주의 회화 양식은 형식에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인간적인 감성이 싸늘히 식어 있었지만, 앵그르에게는 현실에 대한
집착 뿐만 아니라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또한 놓치지 않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앵그르는 들라크르와의 그림에 나타난 극적인 명암과 소란한
움직임의 화풍을 경멸하면서도 실제로 그가 지닌 고전주의적인 성향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공간의 연결과 조합, 투명하고 분리된 빛의 광선을
이용한 풍부한 리듬감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또한 아름다움을 위해 인체를 다소 왜곡시키는데(그랑드 오달리스크)
역시 신고전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신고전주의자들을 지지하던 비평가들로부터 적지 않게 비난과
눈총을 받있다. 스승이었던 다비드와 확연하게 다른 작풍 때문에 '고딕풍'
이라던가 잃은 중국인 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생기있고 발랄한 감성이 담겨져 있는 앵그르의 작품은 화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그는 누구 보다도 자신의 재능을 믿었고, 화가의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무명의 지방 화가로 출발했던 그가 소위 '뜨기"까지는 매우 더딘
시간이 필요했다.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화가들로는 Matisse Picasso부터 Pop-Art
극사실주의자들까지 열거할 있다. 중요한 영향으로 그가 지닌 역량, 근대성
그리고 현실성 등을 내세울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동시대에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여러 화가의 이름을 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Bouguereau까지 연결시킬 있다.
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욕구는 항상 작품의 주된 모티브였다.
그의 눈은 늘상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었고 87세의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예찬은 예술혼으로 끊임없이 불타올랐다.
그는 미술사에서 르느와르나 피카소 다수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자신은 낭만주의적인 회화적 본능과 고전주의의 아카데믹한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생애를 마감했다.

*Marie-Francoise Beauregard, Madame Riviere,1806

*Mademoiselle Caroline Riviere,1806*

그림은 1806 살롱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리비에르 가족 중에
카톨린느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다. 앵그르는 리비에르 일가와 매우
친분 관계가 있어서, 리비에르와 그의 부인을 비롯해 카롤린느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15세의 카롤린느는 작품이 완성된 얼마 후에 짧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음영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밝은 분위기로 그려진 그림은
젊고 화사한 처녀의 아름다움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하얀 피부를 지닌 카롤린느의 목은 길게 뻗어
하얗게 받쳐입은 드레스에 더욱 어울리는 모습이다. 당시 상류사회
여인들의 멋스런 장식인 장갑이나 하얀 목도리를 허리부터 팔에 걸친
모습, 전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카롤린느의 시선 등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두껍지 않은 명쾌한 색채를 바탕으로 화면 구석구석
세밀한 필치로 묘사했기 때문에, 젊은 여인의 미적인 감각은 더욱 이상화
되고 있다. 카롤린느의 뒤로 펼쳐지는 강과 교회 , 낮은 나무 더미와
약간은 흐린 하늘의 풍경은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여인의 신비한 느낌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로 사용된 듯하다.
한편 카롤린느의 초상화가 있는 자세로 그려진 반면, 리비에르와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는 평온하고 안정된 구도를 지닌 앉은 자세로 그려져
있다. 이는 앵그르가 리비에르 가족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관찰해서
인물들을 배치했음을 있다.

*옥좌의 나폴레옹, 1806*

*Madame Antonia Devaucay de Nittis,1807*

*Bather of Valpincon(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그림은 앵그르가 로마로 유학을 떠난 2년이 지나 완성한 작품이다.
앵그르의 회화 기술은 로마에서 기초가 다져지고 신고전주의 화풍의 골격이
완성되는데, 세밀한 고전적 묘사로 이루어진 작품은 르네상스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정도이다.
그림은 욕실에 걸터앉은 젊은 전라 여인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등쪽에 밝은 광선을 비추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는 여인의 육체를
아름답게 이상화시키고 있다. 걸터앉은 침대에 잡힌 세밀한 주름들, 그리고
은밀한 목욕탕 내부를 가리기 위한 벨벳의 커튼이 만들어내는 주름들과 짙은
색채 등은 여인에게 쏟아지는 환한 빛과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형태의 입체적 표현, 치도 어긋나지 않은 세밀한 소묘
매끄러운 기교 등이 완벽한 구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앵그르는 전라의 여인을 그리는 일생을 바쳤는데, 초기 작품인 그림은
그의 회화 작업의 방향이 이미 확고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흡사 터번을 연상케하며, 침대보에 수놓아진 문양이나
커튼, 욕탕의 분위기는 터키의 풍속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가 말년에 <터키탕>이라는 작품을 남겼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있다.

*Alix-Genevieve de Seytres-Caumont, Comtesse de Tournon,1812*

*La Grand Odalisque,1814*

작품은 1819 살롱전에 출품되어 같은 유파인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혹독한 평가를 받았는데, <오달리스크> 그려진 인물의 왜곡된 인체
묘사가 원인이었다. 해부학적인 정확한 소묘의 추구는 르네상스 시대의
빈치 이래 계속 이어져 왔는데, 앵그르의 인체는 매너리즘 화풍을 연상할
만큼 길게 늘어진 척추와 좁은 어깨, 커다란 골반과 작은 발로 묘사된 기형적인
것이었다. 후에 그림은 현대적 양식에 고전적 전통이 결합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
오달리스크"라는 말은 터키 궁의 궁녀를 뜻하는 용어로, 앵그르는 20 년이
지난 후에도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작품을 만들 정도로 "오달리스크"
대해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의 주변에는 매트리스에 깔린
두터운 갈색 모피, 무겁게 늘어진 짙은 청색 커튼, 화려한 빛깔의 담뱃대
수증기를 뿜어내는 실내용 스토브, 황금색 담요 등이 둘러싸여 있다.
후궁들의 방을 뜻하는 하렘은 엄중한 감시와 금기의 장소로서 외부로부터
닫힌 공간인데, 공간에서 벗은 몸을 틀어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유혹적인 표정은 밀실로부터 개방된 바깥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한 신비
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당시는 프랑스가 근동 지방으로
세력을 뻗어나가는 시기였으며, 앵그르는 그림을 통해 터키 풍물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반영하는 소도구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Mme.De Senonnes,1814*

*Raphael and the Fornarina,1814*

*Lady Harriet Mary Montagu and Lady Catherine Caroline Montagu,1815*

*Portrait of Count Guriev,1821*

*Teresa Nogarola, Countess Apponyi,1823*

*Francoise Poncelle, Madame Leblanc,1823*

*Louis-Francois Bertin,1833*

초상화는 당시 데바 신문사 사장인 베르탱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의 인물은 억세고 정력적인 중년남자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약간 흩어진 머리털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넓은 이마로 비치는 밝은
빛은 코를 중심으로 뚜렷한 명암을 가르게 하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신감과 위엄이 엿보인다.
이처럼 억세게 표현된 얼굴에 비해 검은 색의 옷은 몸을 더욱 풍만하게 보이게
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과 검은 옷안에 받쳐입은 하얀 색의 정갈한
셔츠가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온화한 느낌을 발산한다. 이는 배경에
아무 것도 배치시키지를 않고, 어두운 분위기에 약간의 빛이 스며들게 채색한
효과 때문이다. 일종의 초사진(Super-Photograph)으로 보여질 만큼
초상화는 꾸밈없이 인물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습작으로 그려졌던 연필 소묘화에는 명쾌하고 확실한
인물의 특징만이 묘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유채 초상화에서는 강조와
비례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서 강렬하면서도 개성적인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와 같은 내면적인 울림과 외적인 정확한 묘사는 앵그르만이 표현할
있었던 재능이었다. 당시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이 외적으로 정확한
묘사에만 치중해야 했던 불안감은 앵그르가 보여주었던 내면의 감동이라는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Odalisque and Slave,1839*

*Roger and Angelica(Angelica Saved by Ruggiero), 1839*

*Louise de Broglie, Countesse d'Haussonville(도오송빌 백작 부인의 초상),1845*

*Hortense Reiset, Madame Reiset,1846*

*Betty de Rothschild, Baronne de Rothschild,1848*

*샤를르 7 대관식의 다르크,185154*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르크가 본격적으로 역사적 고찰을
받게 1840년대에, 위대한 프랑스 인들의 생애를 담은 『플루타르크
프랑세』라는 책에 앵그르는 다르크의 스케치화를 그려 넣은 적이 있었다.
19
세기 프랑스에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한 신고딕 양식의 교회와 같은
건축상의 치밀한 묘사와 경건하면서도 감각적인 크리스트교의 영광을 재현
하려는 목적으로, 앵그르는 오를레앙의 처녀 다르크를 통해 낭만적인 환상과
꿈을 표현하고 있다. 전설적인 여인인 다르크가 그림 중앙에 우뚝 있고
뒤에는 수도사와 신도들이 경배의 몸짓을 하고 있다. 샤를르 7세의 영광
스러운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이지만, 대관식을 주제로 삼지 않고 다르크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효과가 앞서 있다. 딱딱한 금속 갑옷의
질감은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손에 들고 있는 깃발과 머리
뒤에 입혀진 후광은 다르크의 이미지를 현실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닌
이상화된 신비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위에 놓여진 촛대며 여러 성물들
몸에 부착된 도끼며, , 철갑 마스크, 장갑 등의 세밀한 묘사는 실제로 만져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어둡고 차가운 색채감으로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으며,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편 그림 왼쪽 끝에 무관으로 묘사된
인물은 앵그르의 자화상이라고 전해진다.

*Caroline Maille, Madame Gonse,1852*

*Josephine-Eleonore-Marie-Pauline de Galard de Brassac de Bearn, Princesse de Broglie,1853*

*Marie-Clothilde-Ines de Foucauld, Madame Moitessier,1856*

*The Source(),1856*

앵그르의 작품들에는 여체(女體) 그린 작품들이 많다.
특히 앵그르는 여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을 정밀하면서도 이상화된
모습으로 재현하는 몰두하였다. <> 비롯하여 <터키탕>이나
<
오달리스크>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안젤리크를 구하는 로제> 등에
이르는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그의 회화 세계를 투영한다.
<
> 앵그르의 만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장식적인 아름다움과 새로운
관능미,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확한 데생은 앵그르가 고전주의의
중심적인 화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요소들이다.
물가에서 항아리를 지고 있는 풍만한 나신의 젊은 여인은 샘의 정령이다.
일부러 쏟아버리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는 물병에서는 자연의 근원을
뜻하는 맑은 물이 떨어지고 있다. 엷은 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여인의
표정과 몸은, 그의 초기 작품과는 달리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을 발한다.
이러한 특징은 앵그르 노년에 그의 작업을 도와 주었던 그의 제자,
발즈와 알렉상드르 데코프가 작품을 손보았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제기하게 한다. 작품이 처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820
앵그르가 40 피렌체에서였으며, 완성된 것은 1856 파리였다.
, 36년이라는 상당한 시간 간격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에서 보여주는 젊은 여인의 포즈는 그의 다른 작품 <비너스의 탄생>
에서도 반복해서 취해졌다.

*Venus Anadyomene*

*Delphine Ramel, Madame Ingres,1859*

*Le Bain Turc(터키 욕탕),1862*

젊은 시절에 앵그르는 <목욕하는 여인> 그린 이후로 욕탕과 여자에
관한 끊임없는 흥미와 관심을 보여왔는데, 그의 만년에는 <터키탕>이라는
대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터키 욕탕의 구상은 현실이 아닌 공상적인,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서 그린 것이다.
많은 전라의 여인들을 화면 배경에 모으고, 그림 앞에는 다섯 명의 여인을
배치시키고 있다. 많은 전라의 여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관능성을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 작품은, 보통의 네모난 캔버스가 아닌 원형으로 제작
되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라고 있다.
활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육체적 감각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소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없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앵그르가 고전파 회화를 추구하면서도 근대적 감각에 도전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그림에는, 수많은 전라의 여자들이 각자가 취할 있는 모든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의 누드가 만들어낼 있는 모든 포즈를
연구하던 앵그르의 작업들이 그림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앞쪽에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여자의 포즈가 가장 주의 깊게 묘사되어
있으며, 원근법에 따라 멀리 있는 여인들의 나부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형태만
묘사되었다. 그리고 왼쪽 욕탕 속에 있는 여자도 앵그르가 그림의 구도를 위해
나중에 삽입한 것이다. 그림은 <오달리스크> 더불어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동방 문화로의 경도" 나타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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