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신고전주의

서양미술사18 신고전주의: 다비드

AH101 2012. 2. 16.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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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근대 미술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 전통과 혁신의 시대
자유주의 사상과 왕권의 붕괴로 개성과 주관의 다양한 회화 양식이 나타남


프랑스 혁명과 공화국정부의 수립등 정치, 사회의 혼란과 뒤이어 기계혁명을
이루어낸 산업혁명은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게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치하 그리스, 로마미술의 우아함과 찬란함을 모범으로 삼은
신고전주의 경향이나, 바로크,로코코양식의 대를 이어 상상적인 주제의 표현을
근대양식으로 발전시킨 낭만주의 경향은 서로 공존하게 되었다.
또한 증기선, 철도, 공장 등은 풍부한 상품을 생산할 있게 하였지만, 동시에
기계로 인하여 많은 산업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빈민가에 모이게
하였다. 근대 산업의 발흥은 실로 많은 신앙, 관습, 조직을 파기하였고, 새로운
긴장과 갈등을 조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생활방식은 미술가들
에게 사실적인 일상적 표현을 하게 만든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시기는 짧은 기간안에 다양한 양식이 펼쳐짐으로서 과거와는 다른 현상을
띠고 있다. 고대, 비잔틴,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등은 100여년 혹은 1,000
여년에 걸쳐 개념으로 대변 되었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여러 양식이 세기 안에 공존하게 되었다.


7.  
신고전주의( Neo-Classical Art )

신고전주의 미술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반 유럽세계를 풍미한 예술
양식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바로크·로코코의 인습에 반발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의 복귀경향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합리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고대 예술의 특징인 형태의 이성적인
단순화를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명징성과 질서·이성은 계몽의 시대인 당시의
문화 양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관한 관심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보이지만 특히 헤라크라네움과
폼페이의 발굴, 그리스 소아시아 조사 여행과 더불어 고대문명에 대한 흥미가
고취되었으며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힘입어 대표적인 이론서들이
출간되기에 이르었다. 오늘날에도 신고전주의의 선언서로 인식되는
빙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 고전주의 미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후 고전 고대 미술 작품에 대한 다각적 연구, 역사적·비평적 고찰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18세기 중후반 유럽 등지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
발전, 1) 19세기 아카데미즘 예술의 기본 원리로서 오래 이어졌으나
영감(inspiration) 상실, 기계적인 모방과 무의미한 복제로 나가면서
고대나 이국에 대한 뜨거운 동경과 관능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2)
낭만주의 예술의 선구자로서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또한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 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
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
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등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주요 연대로서, 전대의
태양왕의 철저한 섭정이후 혼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시기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운과 전대의 화려한 정치 성향의 귀족의식이 싹트는 시민
계급의 성장의 정치적 위기, 한편 현대를 예고하는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이
혼재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과 개개인의 자유, 애국심들이 얽힌 감정의
출구가 필요했다.   예술계에서 신고전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그들의 이상에의 갈망을 행동과 사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미술에 나타난 주조는 신고전주의의 경우 "고전미" 흐름의 주요
성격에 보이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새단장은 고전주의의 복귀로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아름다움은
"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칭송받으며 1775 빙켈만의 「그리이스
미술모방론」이란 저서에서 이상미가 재평가 받는다.
결과 고대에의 관심을 팽배하였고, 고대의 특징 , 명석한 판단에 따른
절제되고 철저한 정확성은 혁명정부가 바라던 이상을 적확하게 구현시키기에
알맞았다.  로코코시대가 취한 과도한 사치와 화려는 혁명정부의 번째 숙청
과제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되 명확하고 강직한 , 균형과 조화, 안정과
형식미의 존중은 고전주의를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취한 특징이다.  
오히려 완강하고 절제된 선과 색으로 고전적이라고 있겠다.  
바로크 시대 연장선상에서 Poussain적인 회화의 계승으로 있으며
주제에 드러나 확실한 정치적 의지에 근거한 의도적인 소재, 철저하고
절제된 선묘는 더욱 심화된 고전미를 나타낸다.
한편 공간의 압축화, 실제 사건의 주제화 등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마지막
고전주의자인 Ingres(앵그르) 드러나는 동방취미, 왜곡된 표현은 시대에
부합하는 취미 변화의 반영이자 '낭만정신' 깔린 기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써 새로운 미의식의 예고라 있겠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19세기 중반 '라파엘로 전파'(Pre-Raphaelite Brother-
hood)
이어진다.   근대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신고전주의 미술은
이와같이 발생에 있어 당시의 역사적·사상적·학문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 유럽 전역에 걸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19세기 이후 미술 전개에
하나의 배경을 이루게 것이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9세기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1774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듬해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
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1784)
스타일은 그의 고전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측에 가담하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그러나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적으로는 다듬어진 대구상화(大構想畵)이긴 하지만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초상화에서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을 충분히 살려 참신한 느낌이 약동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추방되어 1816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브루터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고대에서 빌어온
주제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표현된 공간은 고대의 확장된 공간미를 넘어선 오히려 압축된 공간의
사용으로 연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고전미와 더불어 현대적인
요소로의 전환이 드러나고 있다.   '마라의 죽음' 등에서 나타난 실제 사건의
주제화는 은유와 비유를 통한 고대 신화를 한층 대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죽음의 비장미를 강화시키면서 죽음을 영욱적이고
숙엄한 주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비롯된
주제만큼은 엄격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의 수용'(로잘린 크라우스)
보이는 예라 하겠다.   '룩상부르 공원' 그가 수감생활 중에 그린 유일한
풍경화로 정치가 내제한 이전의 회화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있는 실재의 공원의 모습은 안정적인 자연의 일면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고전적인 안정감과 덧붙임 없는 재현은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새로운 이상적
만남이라고 있겠다.  그는 제국이 망하고 추방 되어서도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로 이어서 정신을 잇고 있다.

*Portrait of Marie-Françoise Buron, 1769*

*Count Potocki,1780-81*

*Portrait of Jacques-François Desmaisons, 1782*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1782*

발리자리우스는 6세기경, 로마의 재건에 공을 세웠으나, 동료들의 모함
으로 장님이 되어 추방되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의 장군이었다.  
18
세기 귀족들의 사치와 방종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되면서 계몽주의 지식인
들은 시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따랐던 로마 공화정시대의
영웅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록 발리자리우스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고전미술의 장엄함이야말로
애국적 희생이라는 정신적인 숭고함을 발현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Andromache Mourning Hector,1783*

*Alphonse Leroy,1783*

*The Oath of the Horatii(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그림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애국심과 사랑의 갈등이 담긴 로마사
중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고대 로마와 알바 군대는 서로 전쟁을 해야하는
처지에서 각각의 대표를 뽑아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을 취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의 3형제가 뽑혀 알바 군대의 쿠라티어스가의 아들과
대결을 하게 된다.  호라티우스가의 여동생 카밀라는 쿠라티어스가의 남자와
약혼을 상태였는데, 결국 호라티우스가는 전쟁에서 알바의 쿠라티어스가의
3
형제를 죽이고 개선했다.   이에 약혼자를 잃게 카밀라가 오빠들에게 항의를
하자, 큰오빠는 카밀라를 죽여 버리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잘한 일이라며
아들을 칭찬하게 된다.
그림에서는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호라티우스 3형제가 일렬로 서서
엄숙한 맹세를 하고 있다.  아버지 뒤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며느리가 자식들을
감싸안고 있으며, 여자는 실신한 기대어 누워 있고, 하얀 옷을 입은
카밀라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팔을 늘어뜨린 슬퍼하고 있다.
로마 양식의 건물에 반원의 아치형 기둥 앞의 형제와 아버지의 모습은 강한
색채와 근육, 시선이 집중되는 구도 때문에 역동적으로 보이는 반면, 여인들은
연하고 밝은 색감을 사용해서 늘어져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풍으로 그려진 작품은 사실감, 힘찬 형식의 단순성
영웅적인 주제 강조 등으로 이후 미술사에 위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The Death of Socrates,1787*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려는 순간, 그의 제자는 "사부님이 부당하게 돌아
가셔서 슬프다"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생의 마지막 농담을
던진다.  "그대는 내가 부당하게 죽지 않고 정당하게 죽기를 바라는가?"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숭고의 예술적 표현을
있다.  왼쪽 침대의 아랫부분에 침울한 표정으로 명상에 빠져있는 사람이
바로 풀라톤이다.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을 보면,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말을 하는 소크라테의 말은 아마 숭고의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청중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파토스(감정, 정서, 공감) 우리는
그를 둘러싼 주변인불들의 표정과 제스처에서 읽을 있다.
"
, 이제 우리가 가야할 시간이 왔노라.  나는 죽기 위해, 그대들은 살기 위해.  
우리 누구에게 나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도다.  오직 신만이 아실 ..."
다비드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희생과 박애 정신을 통해 프랑스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갈망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얼굴은 철저한 고증에 의한
재현이라 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모델로 그려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들은 엄격한 해부학을 토대로 그려져 있다.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1788*

*Paris and Helen,1788*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의 정사는 호메로스의
시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파리스가 헬레나를 납치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촉발됐고 사람의 이야기는
화가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다.  
다비드의 '파리스와 헬레나' 사람이 처음 연인으로 맺어지는 밤을 묘사하고
있다.  파리스는 벌거벗은 몸이지만 쓰는 모자를 쓰고 있다.  
헬레나는 옷을 입고 있지만 몽롱한 분위기를 풍기며 파리스를 유혹한다.  
이는 파리스가 잠자고 있는 사이 헬레나가 그의 침실로 들어온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파리스도 헬레나의 유혹을 받아들일 아니라 뜨겁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The Lictors Bring to Brutus the Bodies of His Sons Paris,1789*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에 그려진 작품은 특별히 정치적인 선전을
계산하고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 정신에 입각한 도덕적인 의식을 계몽
하려는 회화로 읽혀질 있는 작품이다.
타르퀸 왕의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로마에 공화정을 세웠던 브루투스는
아들들이 자신이 세운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림은 브루투스의 관리들이 처형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오고 가족들이 이에 슬픔에 빠져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자식들을 죽이라고 명한 브루투스는 화면 왼쪽에 그늘에 가려져 있다.   팔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죄의식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브루투스의 감정을 드러내 주고 있다.  특히, 브루투스가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간 포즈는 감정보다는 머리의 이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림은 다비드가 1784년에 제작한 다른 작품인 <호라티우스의
맹세> 매우 흡사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풍의 건축양식 그림의
주제가 펼쳐지는 왼쪽 , 슬픔과 비탄에 잠긴 여인들을, 오른쪽에 배치시킨
구도 그리고 빛과 색채의 정확한 표현으로 입체감 있는 인물과 사물의 재현
영웅주의의 찬양 등이 작품의 유사성을 말해준다.

*Anne-Marie-Louise Thélusson, Comtesse de Sorcy, 1790*

*Death of Marat,1793*

다비드의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회화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희생과 명예로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발전하였고, 그림이 완성된 10년이 못되어 1789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그림을 주문한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다비드의 혁명 동지였던
마라는 목욕탕에서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인에게 암살을 당했다.  
그림은 다비드가 마라를 추모하며 그렸던 작품이다.  무엇을 쓰고 있던 중에
살해당한 모습으로 손에는 펜이 그대로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코르테가
면회를 요청할 가지고 청원서가 피묻은 쥐여 있다.  가슴을 난자 당해
피가 흐르는 마라의 시체와 음울한 색채의 벽은 살인의 비극성을 폭로하며,
혁명을 완수하려다가 죽은 영웅적인 자세가 연상될 만큼 비장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나무 궤짝에는 "마라에게 바친다(A Marat David)" 라는 글이 비문처럼
새겨져 있으며, 가슴과 손에 상처, 길게 늘어진 , 그리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마라의 방은 혁명가의 순수한 모습을 상징하는 도구처럼 사용되었다.  
그것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에서 보여지는 순교자의 고통과 아픔, 희생을 연상하게 한다.  
작품에서 다비드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로코코풍을 벗어나 강하고 남성적인
영웅을 선택하면서 마라를 통해 시민적인 헌신과 자기 희생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시키고 있다.

*Self-portrait,1794*

자신의 예술을 혁명의 도구 인식했던 다비드, 문화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주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그는 46세라는 중년의 나이였음에도 뺨의 종양으로 인해
혀가 굳고, 얼굴이 틀어졌음에도 자신을 20 초반의 멋쟁이 청년으로 그려
놓았다.

*Monsieur Seriziat,1795*

*Portrait of Gaspar Mayer, 1795*

*The Sabine Women,1796-99*

작품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건국에 대한 전설이다.  로마를 건국한 왕이
사비니의 여인들을 납치하고, 사비니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 오지만
싸움을 말리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비니의 여인들이다.  
여인들은 사비니의 군대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를 향해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과 다투지 것을 애원한다.
비극적인 주제는 다비드가 프랑스 혁명을 통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상징적
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Madame de Verninac,1799*

*Madame Recamier,1800*

신고전주의의 위대한 초상화가였던 다비드의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이다.  초상화의 주문자는 파리 은행가의 아내였던 1800
당시 23세였던 레카미에 부인으로, 미모와 지성으로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의자에 앉아 있는 레카미에 부인은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다.  낮은 의자, 의자의 형태와 합치된 여인의 자세
그리고 왼쪽으로 보이는 길고 가는 스탠드 , 모델의 자세와 모든 소품들이
엄격하고 고요한 신고전주의 양식에 부합되고 있다.
정면을 향해 시선을 향한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부인의 얼굴은 앵그르의 흐르는
유려한 선을 연상시킨다.  보통 대작에서는 보기드문 반짝거리는 붓터치
섬세하고 정확한 기법 등이 다소 건조한 고전 양식에도 불구하고 인물을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직과 수평의 구도가 사물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가 독특한 그림은, 그의 다른 작품들 <포토키 백작>, <라보아
지에의 초상> 더불어 다비드 회화의 주요한 특징과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정작 주문자였던 레카미에 부인은 작품에 불만을 느껴
2
제라르에게 다시 초상화를 주문하였다고 한다.

*Napoleon Crossing the Saint Bernard,1800-01*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상화 시킨 영웅의 초상 가운데 하나다.  
실제 그의 모습은 키도 작고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림처럼 백마의 갈기를 휘날리며 군대와 함께 험한 알프스의
베르나르산을 넘지는 않았다 한다.  나폴레옹은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산을 넘었으며, 부대가 먼저 넘어가고 며칠뒤 따로 안전하게 넘어갔다.  
따라서 초상화는 철저한 허구이다.  다비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형상화 것일 뿐이다.   그림은 예술이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얼마나 대단한 기능을 있는지를 증거한 사례이기도 하다.

    

*Consecration of the Emperor Napoleon I and Coronation of the Empress Josephine in the

Cathedral of Notre-Dame de Paris on 2 Dec 1804(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1806~07*

1804 12 황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된 다비드는 점의 커다란 캔버스에
대관식의 의식을 기념하는 작품을 맡게 된다.
작품들 작품만이 실제로 그려졌는데, 다른 작품은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의 미술관에 있다.  대관식 의식은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다비드는 대관식을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아 스스로 썼다고 하는데, 다비드는
장면 대신, 이미 황제의 관을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비의 관을
씌어주는 장면을 그렸다.  거대한 집단 초상화로 구상된 작품은 100
이상의 실재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나폴레옹 황제와
사이가 나빴던 영국 대사는 그림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화면 정면 별실로
만들어진 장소에는 행사에 불참한 나폴레옹 어머니와 가족들이 보인다.  
다비드가 나폴레옹 부탁으로 그림에 참석시킨 것이다.   다비드는 스케치
단계에서는 인물들을 일직선상으로 세웠으나, 완성작에서는 왼쪽에 있던
군인 명을 오른쪽에 배치, 인물들이 중심 사건을 둘러싸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깊이감을 돋보이게 하고, 관객이 실제로 의식 속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비드의 정교한 붓질, 뛰어난 색채
감각은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두른 모피와 보석들을 화려하게 재현시켰다.
다비드는 1780년대 그의 대표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점차 벗어났다.   작품은 점차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실내 묘사에 치중하게
되는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Datail of Above*

*Portrait of Pope Pius VII,1805*

*Countess Daru,1810*

*Count Francais de Nantes,1811*

*Napoleon in His Study,1812*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은 만성적인 위통과 배뇨장애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쪽에 오는 통증을 가라 앉히려고 조끼 단추를 풀고 배를
문지르는 습관이 있었는데, 누가 오면 매무새를 바로 하고 그냥 단추
사이에 손을 넣는 자세를 취했다 한다.  나폴레옹의 전형적인 포즈가
그림에서 이룬 자의 내면에 숨은 고통이 감지된다.
군주가 목숨을 잃거나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는
음모에 의한 경우가 많다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Portrait of Charlotte David 1813"*

*General Gerard,1816*

*Portrait of the Comtesse Vilain XIIII and her Daughter, 1816*

*Cupid and Psyche,1817*

*Mars Disarmed by Venus and the Three Graces,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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