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설치/비디오아트

서양 미술사91 (행위예술/설치미술/환경미술)

AH101 2012. 2. 17. 01:17
반응형

   

서양 미술사 - 91(행위예술/설치미술/환경미술)

   


33.
비헤이비어 아트(Behaviour Art)


외관을 추구하는 20세기의 새로운 미술 동향을 말한다.
보디 아트(body art)라고도 한다. 개념미술에서 발전한 것으로, 모든 과학이
정신구조와 육체구조의 인과관계의 도식화를 방법론적으로 다루고 있는
비해, 비헤이비어 아트는 특수한 예를 들어 육체의 운동 변화의 여러 조건을
나타냄으로써 시간의 경과에 따른 순간의 육체적 변화를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따라서 비헤이비어 아트는 프로세스 아트와 마찬가지로, 관념을 생산하는
개념미술의 필연적 진전으로 있다.
개념미술에서 비헤이비어 아트로의 전개는 길버트와 조지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들은 변화의 과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육체를 유일한 소재로
이용했다. 미국 비헤이비어 아트의 대표적 작가로는 V. 아콘시, T. 오펜하임
등이 있으며, 독일에서는 K. 스링케와 W. 칼레가 같은 경향의 작가이다.

34. 설치미술(設置美術, Installation Art )


회화나 조각을 전시할 분식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메시지 전달을 위해 색다른
진열방식으로 보여주는 미술이다.
일반적으로 회화·조각을 전시할 작품을 신성화하여 전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설치미술은 개성적인 진열방식을 도입하여 작품의 메시지를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소재가 다양하고 주제도 파격적이며, 시각·청각·후각·촉각 다양한
감각을 총동원한다. 예를 들면 자신이 10년간 타고 다니던 차를 해체하여
전시하는가 하면 1년간 자신이 사용한 생리대를 쌓아놓거나 썩은 고기로 후각
까지 감상의 요소로 끌어들인다. 또한 가지 작품만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결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전통적 미술 양식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실험성을갖고 있고 문명·
사회·정치에 대해 풍자와 비판이 두드러진다.

설치미술의 전시는 대중매체를 확산·심화하는 이점이 있으나 때로는 순수 미술
엄격한 정의를 흔드는 경향이 있다. 설치미술은 비엔날레를 통해 주목을
받았다. 독일 작가 한스 하케의 《마르셀 브로드테르스에 대한 경의》(1983)
냉전시대 분단국가가 겪는 공포의 단면을 인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1995년과 1997 설치미술가 전수천·강익중이 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았다. 48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이불이 '노래방설치작품'으로 특별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사랑을 주제로 90곡의 팝송을 관객이 직접 참여할 있는
2
개의 노래방 캡슐에 함께 설치한 작품인데, 다양한 퍼포먼스와 오브제 작업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강화되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성상품화 등을 형상화
하였다.

이불(1964~)


작가 이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미술무대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동시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이불이 적어도 지난 78년간 우리 나라 젊은 미술가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 받는 작가라고 말할 , 이것에 이의를 제기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중엽부터 시작된 그녀의 국제적 커리어는
개인전 가지만 언급하자면, 1997년의 전시 미술관 쪽에서 부당하게 일부
작품을 철거한 뉴욕 MoMA전과 1999 베니스비엔날레 참가와 특별상 수상을
거쳐 2004년에는 7회의 개인전이 6회가 북미 양국의 · 도시들과 유럽에서
열렸다. 이러한 국내외적으로 '성공한' 이불의 작업에 대한 반응은 비교적 선명
하게 ·반으로 나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중엽까지의 퍼포먼스에
등장한 그녀의 벗은 , 번쩍이는 시퀸들, 조야한 원색의 구슬과 조화, 애니
메이션의 캐릭터나 SF 영화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형상들, 음란한 성적 환상을
불러내는 거대한 규모의 풍선과 행위들, 소녀, 특히 유니폼을 입은 소녀를 선호
하는 남성의 일탈된 취향을 만족시키는 비디오와 그것이 들어 있는 노래방
등은 이불 작업의 외적인 특징들이고, 이들의 출처는 모두 대중문화다.
이러한 요소들은 대중문화에 친숙한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쳐 특히 미술
학도들이 이와 유사한 작품을 양산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소위 '신세대 미술'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의 미술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편의 이유도 무엇보다 대중문화적 요소 때문일
것이다.

*Live Forever(Red), 2000*

혼자 누울 있게 장치된 '스포츠카' 노래방에서는 현대인의 자동차에 대한
물신주의적 집착에 대한 패러디가 발견된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
주었듯이 자동차는 은밀한 성의 장소이고, 많은 시간 거리에 있는 현대인
에게는, 온갖 장식과 비싼 오디오 장치가 들어 있는 차는 집의 등가물이다.
특히 땅이 넓은 미국인에게 자동차는 속도감의 상징이다.
'
스포츠카'에서 관객은 1998년의 노래방 제목인 〈속도보다 위대한 중력〉
아니라 '중력보다 위대한 속도' 꿈꾸지만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공학에 대한 맹신과 그것과 유사한, 남성과 서구에 의해 생산되고
그들과 외의 범주들에 의해 재생산된 지배자적 사고체계 모두의 전복이다.
이불은 "자신을 타자로서 규정한 세계를 규정하기 위한 도구들의 장악을
바탕으로 생존하기 위해" '정복자의 언어' 통달한 사이보그 페미니스트
문학가들처럼 '정복자' 언어를 '읽고 '으로써 '구전적인 원시인' 대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전복시키고 그들 사고의 바탕을 흔든다.

*화엄(Majestic Spendor)> (부분), 1997*

뉴욕 MoMA 설치된 작품은 생선이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로 인해
철거됨으로서 당시 논란거리가 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작품 속에 나타나는 '사이보그' 개념은
그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불의 작업에서 199798년에 처음 등장한 사이보그 개념은 그녀의
작업에 개념상, 조형상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이전 작품들에서 다소 모호했던 이론적 배경을 분명하게
해준 것처럼 보이고, 보는 이에게는 근래 작품을 초기의 작품과 연결시켜
해석할 있는 이론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제공해 준다.
그녀의 사이보그 개념은 이미지로는 다양한 출처의 혼합물이지만
이론적으로는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 아주 가깝다.
그녀 자신도 후자의 '선언' 내용이 자신의 관심거리와 '밀접한 관련'
있음을 인정하면서, '인간과 기계의 구별을 넘나들고 이성구별을 넘어서는
존재로서의 사이보그' 개념을 지적했다. 1985 '사이보그 선언'을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사이버네틱 유기체', '기계와 유기체의 혼성물'이라
정의했다. 그녀는 인류가 의수족이나 안경과 같은 기계의 도움으로 신체
일부를 대체하고, 사이버 공간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된 20세기
말에는 우리 모두가 "이론화되고 조립된 키메라들, 한마디로 사이보그들이다"
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사이보그의 등장을 야기한 가지 결정적인
경계들의 와해 -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유기체(인간-동물) 기계 사이의
그리고 신체적인 것과 비신체적인 사이의 - 들었다.
이의 구분을 가능케 했던 것은 부권적 사회의 토대가 되었고 그것을 지탱
하는 기둥이었던 이원론의 대립항들 가운데 가장 깨뜨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사이보그는 이들 사이의 혼성물로서 기존의 이원론
궁극적으로는 부권적 위계와 지배를 극복할 있는 허구이자 실제의 존재로
보였다. 따라서 그것은 포스트젠더 세계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미니 사이보그 (Pale Pink)*

35. 환경미술(Environments Art)


기존의 미술영역의 범주안에서 미술가의 관심범위를 환경보존과 자연보호에
맞추고, 환경과 자연을 소재로한 작품 활동 등을 포괄적으로 수용하는
용어이다. 1960년대 미술의 상업화에 대한 반대와 당시에 부상한 환경운동
대한 지지에 의해 나타났으며, 환경미술이란 작품을 자체로서 완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주변의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경향
이라고 있다. 1959 가을에 뉴욕 루벤화랑에서 개최된 앨런 카프로에
의한 <여섯 파트로 열여덟의 해프닝> 이라는 제목의 해프닝이 열렸다.
1959
년부터 1960년대까지 존속했던 루벤화랑은 뉴욕중심가에서 크게
활약하던 화랑들 하나로서, 1960년대를 주도한 많은 젊은 작가들이 최초로
등장했던 실험적인 중심지였다. 루벤화랑에서 전시를 가진 작가로는 환경미술
창시자라고 있는 카프로외 다인, 클레스 올덴버그, 조지 시걸,
루카스 사마라스 등이 있다.

일상의 주변환경이나 야외의 공간을 조형화하는 미술로써 주위환경을
아름답고 쾌적하게 하며, 정서적인 안정을 도모하고 생활에 여유를 주는
역할을 한다. 환경미술, 환경조형미술로도 불리우는 현대 도시 공간 안팎에서
마주치는 미술품들은 그것이 전시장 이외의 장소속에 위치하면서 또다른 미술
장르처럼 인식되어 왔다. 환경미술의 예로 학교나 공공건물의 담에 그린
그림, 지하철에 붙어 있는 그림타일, 공공건물 광장에 설치된 조형물들을
있다.이런 유형의 미술품들이 환경 이라는 모호한 낱말과 결합되면서
얻어지는 부가가치는 현대인들에게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눈살을 찌푸
리게하는 도시의 시각적 언어로 등장한 것이다.
환경미술가들은 살아있는 환경속에서 실제의 인간과 실제의 대상물을 결합
시킴으로서 해프닝을 개인주의적이고 고립적인 미술작품으로보다는
전면적인 예술환경을 새롭게 강조하는 경향으로 유도했다.
조각 또한 작품이 다만 관객과 마주 대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라 관객을
둘러싸거나 관객이 작품에 실재적으로 참여하도록 설계된 20세기 조각양식과
지금까지 생활과 미술 사이에 존재하던 전통적인 괴리를 없애려는 20세기
미술의 커다란 흐름이 일부로 발전했다.
환경조각에서는 진흙과 돌에서 빛과 소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것이
매제가 있었다.

환경은 개인적인 것이거나 소수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본래의 뜻이
내포하는 말의 (공공성) 어떤 미술품이라도 그것이 놓이는 장소나
위치하는 곳의 특질과 관계없이 관람자(시민)들이 특별한 제재없이 마주하는
이유로 인해서 서서히 공공성을 획득한 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저기 설치된 환경조형물들이나 실내미술품들이
과연 본래의 의미로서의 공공성을 획득했다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바로 그런 연유로해서 많은 논의들이 있었다. 환경조형물이라는 말은 이제
도시에서 상징적인 힘을 얻어 언어적시각적 폭력을 생산해내고 있다.
우리는 또다른 도시문화라는 미명(美名) 재생산에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된 연유들을 다시 생각해야 시점에 도래한 것이다. 공공 더하기 미술
이라는 겉보기에는 둘다 이의 없는 문화적 기득권으로서(왜냐하면 사회속에서
공공이라는 것은 당연히 좋은 것이고, 미술 또한 당연히 좋은 것으로 존중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상호결합 또한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는 좋은
으로 보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공공미술이 겉보기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성완경 교수의 논의의
출발점은 우리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