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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95 페미니즘미술 : 루이스 부르주아, 바바라 크루거, 에바 헤세

AH101 2012. 2. 17.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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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95(페미니즘:루이스 부르주아,바바라 크루거, 에바 헤세)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 )


"
나의 조각은 나의 심리분석학이다" 라고 작가가 언급하였듯이 루이스 부르주아
작업 세계는 자전적인 심리의 탐구에 기초한다.
부르주아는 무의식과 내면의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욕망, 쾌락, 사랑과 고통,
소외와 고립 과거 속에서 그가 직면하였던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신체, 성적인 이미지와 에로틱하거나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표출되었다.
남성과 젠더에 대한 작가의 분노, 갈등과 혐오를 상징하였던 그의 과거 작업이나
1990
년대 중반 이후에 제작된 대형 거미 조각의 압도적인 규모와 위압적인
형상의 브론즈 작업으로부터 작가는 최근 손바느질한 조각을 제작하고 있다.
이는 재료와 기법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이다. 작가에 따르면 바느질은
치유의 행위를 뜻하고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신작 인물상들은 이렇듯 화해,
통일과 회복을 상징한다. 청동의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성이 아닌 작가의 손이
어루만지듯 천으로 기운 부드럽고 따뜻한 섬유 조각은 인간관계의 여러 가지
모습을 더욱 애절하고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적인 원로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9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
하고 왕성한 작품 제작과 전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녀는 1911 프랑스 파리 태생으로 1938 미국으로 이주하여 1982
뉴욕 근대미술관 (MoMA)에서의 여성 작가 회고전에 이어 8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 남미와 일본 등지에서 차례 회고전을 가졌으며 1999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황금 사자상을 수상하였다.
그녀의 작품은 현재 세계 유수한 미술관들과 주요 콜렉션들에 널리 소장되어
있다. 학계(예일대학과 메사츄세츠 미술대학)로부터는 명예 학위를, 미국과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문화훈장과 일본문화협회로부터는 세계문화상을 수상
하는 작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부르주아는 여전히 작업에 대한
끊임없는 의욕을 보여주고 있다.

   

* UNTITLED, 1997,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 UNTITLED, 1997, Red ink, blue ink, and black ink music paper*

* UNTITLED, 2000, Blue and white fabric and steel*

* DO NOT ABANDON ME, 2001, Fabric and stainless steel*

*MOTHER AND CHILD, 2001, Fabric,stainless steel and wood*

*COUPLE, 2001, Fabric*

*HYSTERICAL, 2001, Fabric, stainless steel, aluminum, glass, wood and lead*

*UNTITLED, 2001, Pink fabric and aluminum*

*CELL XIV (PORTRAIT), 2000, Steel, glass, wood, metal and red fabric*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1945~ ) 바바라 크루거는 시대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아티스트(여성예술가)이다. 그녀는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하는 예술 형식을 통해 남성지배 구조하의 사회적 편견(Stereotype) 저항해왔다. 결과, 그녀가 다루었던 자극적이고 예민한 페미니즘 주제들은 단순히 예술적 차원을 넘어 비평적 대중문화의 형태로서 일반화 되었다. 예를 들면,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회비판적이고 계도적인 텍스트들은 확대와 크롭핑되어 , 잡지, 포스터, 빌보드, 포장용 가방과 티셔츠에 이르기까지 인쇄되었고, 대도시 공공장소의 선전용 문안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바바라 크루거의 예술세계의 일차적 전략목표는 개인을 포함한 사회 내부에 침투해 있는 제도적 권력에 항거하는 일이다. 여기서 제도적 권력이란 남성지배 구조하에 조성되어 있는 사회적 편견을 말하며, 권력에 항거하는 일은 현대예술의 담론(Discourse) 통해서 문화와 정치의 실천적 개혁을 촉구하는 것이다. 크루거는 지난 십수년간 훌륭한 대중 정치인의 역할을 수행해왔다. 정치선동가로 오인될 만큼 급진적이었던 크루거 작품은 창조라는 예술적 목표와 정치속에 문화의 확장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크루거의 전략은 70년대 미술, 특히 개념 미술가들에게 일반화 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바바라 크루거는 1945 미국 뉴저지의 중산층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964 뉴욕주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학업을 단념 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뉴욕시에 있는 파슨 디자인 학교에 등록하여 파인아트 프로그램을 집중 교육받았다. 훌륭한 예술가에게는 학창시절 훌륭한 선생과의 만남이 있듯이 이때 그녀에게도 사진가 다이안 아버스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하퍼스 바자] 아트 디렉터인 마빈 이스라엘과의 만남이 있었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은 사진이라기보다는 그래픽적인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사진으로 편입시킬 있고, 사진가라고 지칭 만한 요소가 있다면 역시 그녀의 초기 작품과 제작 과정을 통해서 이다. 1969, 크루거가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세계로 시각을 돌렸을 때는 아트와 미니멀리즘이 후퇴하고 개념미술이 득세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예술 양식에 관계없이 시기는 페미니스트 아티스트들이 할거했던 70년대 중반의 예술시장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남성 중심의 예술구조였다. 따라서 여성 예술가들의 입지는 필연적으로 협소할 밖에 없었고 성적 차별과 편견으로 인하여 원만한 작품 활동도 하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1976년은 크루거가 사진으로 방향을 돌렸던 해이다. 크루거는 그해 가을, 뉴욕 에서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거처를 옮겼다. 교육적인 문제 때문에 한정된 시간을 할애하여 캘리포니아에 머물렀지만 그녀로서는 중요한 예술적 전환기를 맞이 했다. 1974 이래 거의 작품을 중단하고 사회단체 일과 정치적 행동에 관심 가졌던 그녀가 다시 예술세계로 귀환했을 보여주었던 이때의 작업들은 1977, 하층민의 애환을 상징하는 글과 함께 [Picture/Reading](1977)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케이트 린커에 따르면, "이때가 처음으로 사진과 텍스트가 대위법적으로 만나는 시점"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바바라 크루거는 데이비드 살르와 바바라 브름이 포함된 예술 그룹의 일원으로 참여했다(이들이 주로 뉴욕 메리 화랑의 멤버들이다). 그룹은 나중 세리 래빈, 신디 셔먼, 리차드 프린스 등이 조우함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들 예술가들의 면면에서 우리는 쉽게 이들이 제기하는 이슈들을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가 있다. 이들 아티스트들의 이슈는 대중매체 활용할 전략과 새로운 리얼리티의 중재 그리고 사회 속에 혼재하는 다원주의 기호체계(Channel of Signs) 상설화하는 것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경우는 힘을 동반하는 언어, 힘이 실린 비평적 텍스트를 통해서 새로운 기호체계를 실험했다. 시기부터 이미지와 함께 사회적 공론을 담고 있는 크루거의 '대중 시각언어(Popular Visual Language)' 기호의 확장과 함께 문화적 정보로서 파급효과가 컸다. 1980년의 작품 <당신이 즐거워 하는 찰나는 군사전략의 정교함을 가지고 있다(Your moments of joy have the precision of military strategy)>라는 텍스트는 바로 전략의 신호탄 이라 있다. 사진에서의 텍스트는 '당신' 전체 남성을 겨냥한 페미니즘적 시각에 접근해 있지만 이미지와는 별개로 작용하고 있다. 1982 독일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 마치 롤랑 바르트의 주장을 실행에 옮기기나 하듯이 크루거의 전략적 성공 무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카셀 도큐멘타는 참가만으로도 대단한 영예이지만, 크루거의 경우는 단순한 영예 이상의 의미가 있었던 각별한 초대였다. 당시 카셀시 전역은 크루거의 1980 작품 <당신이 즐거워하는 찰나는 군사전략의 정교함을 가지고 있다> 슬로건이 담긴 포스터로 장식되었다. 언어를 통해 대중에 접근하고, 접근을 통해 권력에 저항하는 채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카셀 도큐멘타는 크루거의 번째 예술적 성공이라고 보여진다. 하여튼 카셀사건 이후론 미국 에서도 자연스럽게 타임 스케어를 비롯한 주요도시에 크루거의 전략적 텍스트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바바라 크루거 작품에서의 'WHO' 주체는 권력의 지배자와 지배자 양자를 지칭한다. 여기서 말한 권력이란 특별한 제도속에 점유되어 있는 실질적 권력, 상징화된 권력을 말한다. 현대사회의 권력은 확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익명화 되어 있거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미셀 푸코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권력은 "원격조정에 의해 교묘한 배치, 전략적 이동, 전술, 기술 그리고 기능을 통해서 전략적으로 통제되고 있다" 했다. 말의 참뜻은 현대사회의 권력행사는 물리력이 아니라 상징적 효과, 그리고 생활과 밀접한 메커니즘을 통해 침투하고 작용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바라 크루거의 80년대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스테레오 타입의 추궁은 당시 사회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 이런 이슈들은 작가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있는 공감대, 바꿔 말하면 보편적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 이다. 크루거가 구사했던 여성문제에 관한 텍스트들은 대부분 남성적 언어이며 이것들은 언어를 통한 문화적 도전이자 여성들에게 경각심 유도 그리고 나아가 권력에 맞선 힘의 비판이 확실하다. 바바라 크루거는 이러한 사진적 특성을 일찍이 간파했던 선구자적 아티스트였다. 물론, 크루거는 사진이 갖고 있는 일반적 채널에 대해 확실하게 대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가 주장한 있듯이 '최후의 언어는 이미지'라는 개념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관심을 가졌던 쪽이 텍스트였고 사진은 텍스트를 위한 하나의 매체로서 충실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을 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진실의 가면을 쓰고 통용되는 허다한 사진들보다, 평범한 사진이라도 매체와 잘만 결합하면 얼마만큼 무기가 있는가를 증명해 실질적 본보기라고 하겠다.

   

   

*1989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 (Your body is a battleground)*

   

   

1989 워싱턴 DC에서 벌어졌던 낙태법 철회와 관련된 여성 시위와
관련하여 낙태의 권리가 여성의 것임에도, 배속의 태아를 죽이고 살리는 일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과 분노로 나타난
작품이다. 크루거는 페미니스트로서, 그것도 강직한 페미니즘 아티스트로서
현대사진의 기둥으로 자리해 왔다.
신디 셔먼이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남성문화, 남성위주의 주류 문화에 항거하고
여성들에게 정체성을 자각하자는 메시지를 철저하게 예술의 영역에서, 예술적
표현수단으로 말해 왔다면, 바바라 크루거는 똑같은 이슈에 대해 직접 현장에서
정치 참여적으로 수행해 왔고, 작품에 있어서도 대중들이 있는 공공 장소의
포스트, 대중들이 보는 광고탑, 그리고 대중들이 착용하는 티셔츠 혹은 메고
다니는 가방에까지 자신의 표현 수단인 붉은 볼드 타입의 텍스트와 이미지를
새겨 넣어 왔다. 언어와 사진이 만났을 때의 파괴력을 간파한 그녀는 사진 못지
않게 텍스트를 중요시했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는가에 대해서도 소흘히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진이 언어와 결합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효과를 강력하게 실증적으로 보여준 아트스트가 바바라 크루거였다.
그녀는 , 사진을 찍기 보다는 오래된 사진 연간물, 실용 안내서, 잡지로부터
사진을 골라내어 재작업 대중적 명언,정치문구, 광고 선전문구로부터
유래된 강력한 풍자적인 글을 사진에 덧붙임으로써 정확히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해낸다.

   

   

   

   

   

   

   

   

   

   

   

에바 헤세(Eva Hesse: 1936~1970)


독일태생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유태인 세대였으며, 뇌종양으로 1970 뉴욕에서
사망했다. 에바 헤세는 1960년대의 미국 미술의 우상(icon)이며, 그녀의 작품은
다음 세대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은 헤세와 그녀의 가족들이 1938 이후로 강제로 추방당한 곳이다.
당시 기업가이자 아트 컬렉터인 프리드리히 아른하르트 샤이드트(Friedrich
Arnhard Scheidt)
헤세와 그녀의 남편인 조각가 도일(Tom Doyle) 초청
하여 그녀가 귀환할 있도록 했다. 헤세 부부는 1964 6월부터 1965 8
까지 그녀의 고국에서 생활했으며, 에셍 (Essen)부근에 있는 샤이드트의 케트비히
온더 루르 (Kettwig-on-th-Ruhr) 버려진 방직 공장을 작업실로 삼았다.
독일에서의 시기는 헤세의 개성적이고 예술가적인 발전 단계를 보여주는 표준 시기
입증되었다. 시기는 그녀의 작업에서 일종의 방법론적인 전환점으로서, 회화
드로잉에서 벗어나 꼴라쥬와 조각적이고 조형적인 예술작품들로 향하는 전환을
보여준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선적이고 단색조의 미니멀적인 표현을 위하여 구상적
요소들을 제거했음을 나타낸다.

비엔나 미술관(Kunsthalle Wien)에서의 전시는 시기 이전과 독일에서의 체류
동안에 제작되었던 60개의 드로잉, 꼴라쥬, 과슈, 그리고 부조 등을 보여준다.
더욱이 몇몇 작품들은 그녀가 고국으로 귀환 즉시 만들어졌던 것들이다.
케트비히(Kettwig)시절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온 이러한 후기 작품들은, 헤세의 성숙기
이자 후기 미니멀리스트들에게 영감을 것들이며, 34세의 나이에 일찍 죽음을 맞이
하였던 짧은 생애를 포함하고 있다.
독일에서 작업한 첫번째 드로잉 연작들은 추상표현주의자의 색채를 꼴라쥬 하였으며,
헤세가 1965 3 18일에 르윗(Sol LeWitt)에게 보낸 편지 내용처럼 "거친 공간
(wild space)"
보여준다. 결과 그녀가 화가로서 작업한 이래로, 드로잉들은 더욱
구조적으로 나타났으며, 공간은 정사각형의 일종인 그리드(격자)구조의 반복적인 사용
으로 채워졌다. 이때부터 유기적이며 기계적인 요소들이 조형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의 투명한(crystalline) 선의 기계 드로잉(Machine dawing), 버려진
공장의 홀에 널려져 있던 오브제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마침내 헤세는 공간의
압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이러한 양상으로 헤세는
이러한 드로잉을 지배하는 의미에 대한 무시로서 'nonsense' 대해 말했다.
그녀는 3차원의 부조 오브제를 만들었고, 이것은 조각가가 되기 위한 결정적 극복을
보여준다. 색의 효과적인 사용은 독일에 머물렀던 기간의 특징이라고 있고,
이것은 점차적으로 부드러운 단색조로 대체되었다.
지난 동안 비엔나 미술관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중요한 작품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작가들의 출간되지 않았던 글들을 전시와 함께 펴내는 작업도 완성
하였다. 비엔나 전시에서 비로서 에바 헤세의 독일에서의 일기 메모책이 출간되게
것이다. 또한 카타로그에서는 시기 동안 창작된 작품들을 특색 있게 다루고 있고
이는 국제갤러리에서의 도록 출판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작가의 개인적인 양상과 예술가적인 변화에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
하고 있고 당대의 세부적 기록들을 보여준다.
에바 헤세는 그녀의 일기와 노트에서 예술가적 도전으로 중대한 통찰력을 보여
주었고, 또한 그녀의 내면의 개인적 갈등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였으며, 여성 아티스트
로서 그리고 동시에 아내로서 , 그리고 성공한 조각가이자 주부로서 자신이 결심한
생활을 이끌고자 원했던 목표의 모순성을 담아냈다. "나는 많은 것들을 가질 없다
여성, 아름다움, 아티스트, 아내, 주부, 요리사, 여성 판매원, 이러한 모든 것들. 나는
심지어 자신이 무엇인지도 없다."
에바 헤세가 케트비히 온더 루르(Kettwig-on-th-Ruhr) 주요 거주지로 삼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작가 노트에서 도일과 활발한 여행을 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브뤼셀, 파리, 로마, 마조르카를 여행하였고, 베른, 바젤, 취리히, 뒤셀
도르프 등지에서 전시 오프닝에 참가하는 짧은 여행을 했다. 헤세와 도일은 유럽에서
체류하는 동안에, 그들 자신이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안에서 다양성을 지닌
이들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이러한 혼합은 헤세가 만들어내는 형태의 표현에 근거해
창조되었고 정밀한 단계를 향해 기량을 연마하였다.

   

*untitled, 1962*

*Untitled, 1962*

* untitled, 1963*

*Untitled, 1963*

*Untitled, 1963*

*Untitled, 1963*

*Untitled, 1964*

*Untitled, 1964*

*Untitled, 1964*

*Untitled, 1964*

*Untitled, 1964*

*Untitled, 1964*

*Untitled, 1964*

*Untitled, 1964*

* LEGS OF A WALKING BALL, 1965*

*H+H, 1965*

*Oomamaboomba, 1965*

*Untitled, 1965*

*Untitled, 1965*

*Ringaround Arosie,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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