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르네상스 - 플랑드르

서양미술사11 르네상스 네덜란드 한스홀바인

AH101 2012. 2. 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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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  아버지인 화가 한스 홀바인에게 그림을
배웠다.  스위스 바젤에서 동생 암브로지우스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1515
년부터 26년까지 바젤에 체재, 이탈리아·영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A. 만테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고
명쾌한 고전적 화풍의 기초를 구축하였으며 투철한 사실적인 관찰과 뛰어난
기교로 의상의 재질감까지 교묘하게 나타내었다.  32 이후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서 활동하며 ·왕비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찾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부터 종교화 화가였던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가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 『우상 예찬』(1509)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 여러 제작하였는데
1523년에 제작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다.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된다.  1526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그는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 영국 헨리 8(Henry ) 초상화가가 되었는데, 1540년에
그린 <헨리 8> 왕실 초상화가로서의 홀바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왕은 1539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
목적에 적합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궁정화가로 활동하다가 런던에 퍼진 전염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Erasmus of Rotterdam,1523*

*글을 쓰고 있는 에라스무스,1523*

작품은 당시 종교개혁의 혼란함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갔던 홀바인이
앙리 8세의 궁정화가로 들어갈 있게끔 추천해 준에라스무스를 그린
초상화이다.  에라스무스는 " (바젤, 스위스) 미술은 얼어붙고 있습니다"
라고 토마스 모어에게 썼다고 하는데 홀바인과는 후에 애증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시기의 초상화들은 주로 교황이나 종교적 권위를 나타내는
그림이 주요한 흐름이었는데, 홀바인은 종교적인 색채를 완전히 벗어난
작품들만을 그렸다.  그들 대신 국왕이나 귀족 새로운 형태의 모델들이
교부가 가진 권위를 대신하게 만들었는데, 홀바인의 작품은 그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있다.
필기를 하는 모습은 에라스무스가 인문학자임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왼손에 끼어진 반지들은 경제적 지위와 신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모델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은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진리를 말하기 전에는 열지 않을 듯이 다문 입술,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취한 듯한 단정한 자세 등은 모델이
지닌 성격을 치밀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모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사실적으로 인물을 드러내게 만드는 홀바인의 고집스런 기질은, 그가 그린
다른 150 점의 초상화를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Sir Thomas More, 1527*

*천문학자 니콜라, 1528*

작품은 앙리 8 천문학자를 지냈던 니콜라 크라체를 그린 것이다.  
홀바인의 초상화는 대부분 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그린 것들이
대부분인데, 작품도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았던 당대 학자를 그린 전형적인
작품이다.  홀바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초상들은 대체로 지위나 권세가
높을수록 화면 가득히 그려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데, 작품에서도 모델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린 것처럼 화면에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그림의 모델인 니콜라 크라체는 손에 천체를 재는 도구와 컴퍼스를 쥐고 있다.  
이는 모델의 직업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였는데, 그의 다른 작품 <에라스무스의
초상> 연작들에는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직업을 보여주는 책과 필기 도구가
그려져 있음을 있다.  천문학자의 책상답게 가위며 나침반, 무언가 적혀
있는 종이, 등이 놓여 있고, 모델의 벽에는 천문대를 나타내는 모형과
당시에 지구와 천체를 재는 도구로 쓰였음직한 도구가 또한 벽에 걸려 있다.  
도구들은 밝은 색감으로 채색되었으며, 인물과는 대조적으로 정밀한 묘사를
통해 마치 손으로 만져질 듯하다.
인물은 정면을 쳐다보지 않고 옆면을 응시하는데, 굵은 얼굴 윤곽과 두껍고
어두운 색채의 의상, 실내인데도 멋을 내기 위해 모자 등은 니콜라가
진지한 성격을 가진 소유자며, 외모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물의 외양을 정확히 모사하는 것을 넘어서,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낸 홀바인의 탁월한 재능을 그대로 입증하는 작품이다.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1528*

제단화의 중앙에 왕관을 성모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고, 하단에 마이어
시장의 일가족의 초상화가 안정감을 주는 삼각형 구도로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인 색조는 어두운 편이다.  다빈치의 영향을 받은듯 우수에 잠긴 성모와
전면의 아기를 안은 인물, 우측의 북유럽 르네상스식의 딱딱한 인물들에 비해
지극히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마이어시장의 인물표현이 친근하다.

*Georg Gisze, a German merchant in London,1532*

*The Artist's Wife, Elsbeth Binzenstock

and her Two Children, Philip and Catherine,1528*

*Sir Brian Tuke,1527*

*Double Portrait of Sir Thomas Godsalve and His Son John,1528*

*Portrait of a member of the Wedigh Family, 1532*

*Robert Cheseman, 1533*

*Charles de Solier, Sieur de Morette,1534-5*

*Dierick Berck,1536*

*Portrait of Jane Seymour,1536~37*

*Anne of Cleves,1538-9*

*Edward, Prince of Wales,1538-*

*Henry VIII,1536*

*Henry VIII, after 1537*

*Portrait of Henry VIII, 1540*

*The Ambassadors,1533*

홀바인의 진정한 수작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딩테빌(Jean de Dinteville) 죠르쥬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제일 윗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반해, 아랫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이다.   아래 바닥의 중앙엔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있다.  눈을 오른쪽 인물의아래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형상을 보면 이것은 인간의 해골이다.  홀바인은 해골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이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모든 무상함을
말하려 것일까?

*Christina of Denmark,1538*

*Thomas Howard, Prince of Norfolk, 1539-40*

*Portrait of Margaret Wyatt, Lady Lee. 1540*

*Portrait of Catherine Howard, 1540-41*

*Portrait of Duke Antony the Good of Lorraine, 1543*

   

원본 위치 <http://www.inilnet.com/bbs/zboard.php?id=board5&page=29&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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