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에꼴 드 파리

서양미술사66 에꼴 드 파리 - 샤갈

AH101 2012. 2. 16.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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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66(에꼴 파리:마르크 샤갈 )

27. 에꼴 드 파리( Ecole de Paris: 1차 세계 대전 ~ 2차 세계 대전 사이)
- 국적을 불문하고 파리에서 활약하던 예술가들의 총칭

Self-Portrait, 1914

에꼴 드 파리(Ecole de Paris)란 국적을 불문하고 파리에서 활약하던 예술가들
의 총칭이다. 이들은 대개 1883년∼1900년 사이에 출생한 유대계 외국인들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조국을 떠나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활동
하였던 파리에 모여 예술활동을 하던 외국인 예술가 집단을 일컫는 말로 일명 파리파
라고도 한다. 파리화파는 양차 대전사이에 관용 분위기속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파리에서 실행되었던 모든 종류의 미술-형식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초현실주의부터 추상, 창조 그룹의 철저한 형식주의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파리의 몽파르
나스를 중심으로 모였던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킨다. 피카소나 브라크도 넓은 의미에서는
파리파에 속했다.

에콜 드 파리의 화가라는 호칭은 그 한계가 매우 막연하다. 우선 에콜 드 파리라는 명칭부터
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첫번째의 경우는 좁은 의미로서, 제 1 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타국에서 파리로 흘러들어 온
일군의 보헤미안 화가들을 가르키며, 두번째는 보다 넓은 의미로서, 20 세기 초두부터 파리
의 미술 무대에 등장하는 모든 화가들을 통틀어 의미한다.
그러나 본래의 뜻에서의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카임 수틴, 줄리어
스 파스킨, 모이세 키슬링 그리고 마르크 샤갈 등 스스로 국적을 버린 무국적의 고독한 화가
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술을 가꾸어 준 것이 바로 파리의 예술적 분위기였다.
한편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나, 이들 모두가 유태계의 화가들이며 아마도 그 혈통 때문에
그들 모두의 작품에는 망국과 박해의 숙명적인 애수와 불안이 감돌고 동시에 이들 화가들은
각기 그들이 속한 민족의 자질을 살려낼 줄 알았다.
이탈리아 태생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의 고전적인 단정함을 그의 풍만하고 관능
적인 누드 작품에서도 결코 잃지 않는다. 또 리투아니아 태생의 카임 수틴은 이와는 반대로
인물이든 풍경이든 화폭에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난폭한 필촉과 색채의 작렬로 억눌린
분노를 폭발시켰다. 작품들에서는 주로 낭만적이고 서정성을 띤 표현주의적 경향이 보이고
우아한 애수가 깃든 인물상과 섬세한 관능미를 표현하였으며, 소박한 공상과 격렬한 정서를
나타내는 등 저마다의 감성을 화폭에 담았으나 공통적으로 불안과 애수가 바탕에 있다.

Self Portrait, 1959-1968

러시아 비테프스크 태생의 프랑스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
은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화가이자 미술사의 독특한 위치를 지닌 작가이다.
98세의 오랜 삶을 통해 동심으로부터 무용과 꿈, 그리고 성경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현란한 색채와 형상으로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한 그는 피카소의 표현을 빌자면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로 여겨지고 있다.
샤갈은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적 인기작가다.
특히 우리에겐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 인용될 정도로 친숙하다.
1887년 러시아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나 1985년 사망한 샤갈은 100년 가까이 살며 이국
(異國)을 떠돌았고 그 와중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 러시아 혁명, 나치 박해 등 굵직한 고난
들을 겪었다.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에콜 드 파리의 가장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20세기 화가의 한
사람인 그는 야수주의의 강렬한 색채와 입체주의의 새로운 공간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민속적인 주제와 유대인의 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낭만적
이고 순수한 표현을 발전시켰다. 그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의 선조격으로 숭앙
(崇仰) 받았지만 샤갈은 동시대의 어떤 미술사조에도 몸담지 않은 가장 독창적이고 신비스러
운 작품 세계를 만들어왔다. 그의 그림에서는 동물과 꽃의 모티브, 지방 마을의 풍속, 신부,
연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동물과 꽃은 행복한 남녀의 배경을 장식하며 사랑하는 연인
들은 지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훨훨 날아 다닌다. 샤갈의 그림에서 여인은 휴식이자 빛과 같은
존재이며, 후기 작품에서는 음악과 결부되기도 한다. 화려한 색채와 친근한 주제와 이미지
들이 전세계 대중으로 하여금 그의 그림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에 이어 대중적 인지도에서 5위에 랭크될 만큼 근대작가로서 또
80년대까지 삶을 누린 현대작가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파고든 작가, 마르크 샤갈.
그러나 한번도 어떤 주의, 주장, 단체에 머문 적이 없다. 유대인이면서도 종교에 집착하지
않았고, 파리 뉴욕 등지에서 숱한 예술인들과 교류했지만 어느 유파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이런 부유(浮遊)와 변경(邊境)의 삶은 그의 작품 세계에 그대로 녹아 있다.
중력을 무시하고 우주 유영을 하듯 날아다니는 꽃, 사람, 동물, 집들은 '떠나 있지만, 매이
지 않는, 그러기에 떠돌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며 중력이라는 질서가 지배
하는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유한성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미술사가들은 평하고 있다.
외국인으로, 유대인으로, 방랑자로 신산(辛酸)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분노가 없다.
삶의 즐거움과 행복한 꿈이 가득하다. 그의 그림이 양식과 유파를 뛰어넘어 세계인들에게
서정과 꿈, 순수성과 영적인 감동을 선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유는 샤갈이 평생 천착
(穿鑿)한 주제가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었기 때문이다.

I and the Village, 1911

이 작품은 샤걀이 파리로 온 이듬해 1911년 그에게 파리에서의 첫 무대인 앙데팡당전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에는 인간과 동물의 기묘한 대면 외에, 화면의 빈자리
에는 여러 가지 이미지가 마치 꿈속처럼 아무런 연관도 없는 듯이 배치되어 있다.
화면 아래쪽에는 눈을 뒤집어쓴 나무, 위쪽에는 십자가가 달린 탑을 꼭대기에 인 둥근
지붕의 교회와 거기에 이어진 집들, 긴 낫을 어깨에 맨 농부, 그 농부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마치 하늘에 매달린 것처럼 거꾸로 선 여자(그러로 보면 그녀의 발 아래에 있는
집도 지붕을 아래로 하고 거꾸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 마치 수수께기와
같은 이 화면에 '나'라는 것은 화면 오른쪽에서 옆얼굴을 반쯤 보이고 있는 녹색의 남자
임에 틀림없다. 두 눈 사이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유태계 특유의 삼각형 코는 샤갈 자신
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녹색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나 인물, 건물
로 이루어진 꿈과 같은 정경은 분명 샤갈이 태어난 러시아의 한촌 비테프스크의 풍경일
것이다. 아니, 풍경이라기보다도 그것은 샤갈의 마음속에 있는 고향의 얼굴이다.
그러한 여러 가지 고향의 이미지는 꽃의 도시라고 불리는 파리로 오고 나서도 샤갈의 마음
속에서 불꽃처럼 반짝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여자와 집들은 이러한 풍경이 현실 세계의 것이 아니라 샤갈의 마음
속 세계임을 말해 준다. 여기에 그려진 마을은 샤갈의 마음속 풍경의 마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풍경을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샤걀에게 이것은 눈앞에서 보는 현실보다도 훨씬 생생한 존재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샤갈의 작품에서는 종종 인간이 공중을 날거나 동물이 음악을 연주하는 등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환상이라든가 꿈이라고 부르지만, 그러나 어린
아이들에게는 옛날이야기의 세계가 때로 현실의 일상보다 훨씬 친숙한 세계이듯이 환상의
세계에서 생생한 현실을 느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시인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샤갈의 경우 그 환상은 명확한 조형 표현에 의해 현실
이상의 강력함을 얻고 있다. 샤갈의 친구였던 시인 아폴리네르는 이 시절 샤갈의 작품을
'쉬르나튀랄리슴(초자연주의)'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아마 아폴리네르도 샤갈의 화면
에서 현실 세계에서 얻을 수 없는 이상한 실재감을 느꼈을 것이다. 샤갈의 환상이 가진
실재감은 그가 고향의 교회나 농부나 동물들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데서 온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옆에 있지 않을 때 한층 강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한층 절실하게
그 모습을 그리게 된다. 샤갈은 파리에 와서 한층 강하게 고향에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나와 마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샤갈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
땅에 대한 향수와 파리로 와서 배운 새로운 조형 표현만은 아니다. 이 두 가지의 환상적
인 조합을 통해, 이 작품은 환상성의 생생함으로 샤갈이라는 한 귀한 시인의 영혼의 본질
까지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Bride with a Fan, 1911

Green Donkey, 1911

The Soldier Drinks, 1911-12

Adam and Eve, 1912

이 작품은 샤갈의 작품 중에서 면을 가장 세분화한 작품 일 것이다. 당시 그는 벽에 세잔의
복제화를 몇 장이나 붙여 놓을 정도 세잔의 만년의 입체파의 모체가 된 조형 이념을 동경
하였고 '우리들은 모두 세잔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 레제, 브라크에 가장 심취해 있었다.
일찍이 제작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해체를 철저히 파고 들려고 결의하고
있었던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추측할 수가 있다.
이 작품은 형태가 그렇게 세분화되어도 유동적이고, 음상이 또렷또렷한, 마치 바하의 토카
타를 듣는 것처럼 장엄하다. 이러한 수법은 후일 렝스 성당이나 메쓰 성당의 스테인드글라
스 제작에 되살아난다. 샤갈의 다른 작품에도 그러하지만, 인물의 표정에 있어서 음산한
면은 금단의 열매를 딴 악의 주제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The Cattle Dealer, 1912

The Spoonful of Milk, 1912

The Fiddler, 1912-13

샤갈은 그의 일생동안의 작품 속에 꽃다발, 말, 소, 닭,서커스, 바이올린, 첼로 등의 악기를
되풀이하여 등장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그가 고향에서 어릴 때부터 대하던 그의 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어린 시절 그리움과 회상에서 그렸을 것이다.
지붕 위에 선 인물은 초자연적인 크기로 그려져 지구를 딛고 선 남자 천사처럼 눈이 내린
지구 저쪽의 마을을 배경으로 흥겹게 선율을 자아내고 있다. 오른쪽 밑에는 나무에 몇 마리
의 새들이 그 소리를 즐기고 있고, 왼편에는 화환을 들고 세 사람의 남매가 소리나는 곳을
찾아 모여 들고 있다. 명확한 흑백 대조의 화면 속에 그 의 유년기의 회상을 듣는 듯하다.

Self-Portrait with Seven Fingers(일곱 손가락의 자화상), 1913

이 작품은 부분적으로 처음으로 파리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왼쪽 창밖에 거리와 에펠탑이 그려진 현실로의 파리와, 오른쪽 벽에는 회상으로서의 비테프
스크를 나타내어 그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결합시키고 있다.
그가 그린 얼굴은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괴신(怪神)의 것으로, 그 현실성
은 일곱 개의 손가락과 함께 조화되고 있다. 이 일곱 손가락은 누르고 있는 화포(畵布)속
에 그려진 그림의 세계와 조화되며 다시 배경의 벽에 그려진 헤브라이 문자에 속하는 신기한
문명의 비밀과 조화되고 있다.

Paris Through My Window(창문에서 바라본 파리), 1913

창가에 있는 두 얼굴의 사람은 내면과 외면의 관계를 나타낸다. 이 기간 동안 샤갈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미술가들로 가득했던 몽파르나스 지역에서 살았다.

The Flying Carriage, 1913

Above the Town, 1914-1918

The Birthday, 1915

Bella with a White Collar(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17

The Painter to the Moon, 1917

Cemetery Gates, 1917

산책, 1917~18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러시아는 대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1914년에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그때 샤갈은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페트로 그라드의 미하이로스키 극장에 집결한 시인, 화가, 배우들이 미래의 문화
성의 초석을 위하여 샤갈을 미술국장에 추대하였으나, 그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여 비테프
스크의 벨라 집으로 돌아와 화업에 전념, 사태를 관망했다. 이때 그린 작품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이나 <산책>은 이 시기 사랑의 찬가이다.
드디어 약탈과 파괴에 멍든 고향의 산하에서 첫딸을 얻은 아내를 넓은 우주 공간에 휘돌리
는 이 작품은 매우 대범하게 처리 한 그의 동화적 표현에 의하여 매혹적이다.
그리고 빨강과 초록의 두 계통의 색채로써 그 농담의 변화를 주면서 맑고 커다란 화면을
이루고 있다. 아내 벨라와의 사랑은 샤갈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든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 작품에서 샤갈은 자신의 고향인 비테프스크의 풍경을 배경
으로 연처럼 공기 중에 떠 있는 벨라의 손을 잡고 있다.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

비테프스크의 처가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그린 작품들 중 가장 대표할 수 있는
그의 사랑의 찬가가 바로 이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 초상>이다.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
그의 스타일에 있어 명확한 하나의 전기를 가져왔다. 화면 전체에 명쾌한 빛이 넘치게
되고 더구나 억제된 약동감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까닭은, 배경 오른편에 두텁게 노란
마티에르가 왼쪽의 청색과 효과적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세 인물을 일체화하는 요소에
의하여 심정의 흐름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딸 이다가 천사처럼
아버지의 머리 위에서 날개치고 있고, 그 주변에 부부의 몸 쪽으로 붙어서 흐르는 짙은
파랑색은 윤곽이 아니고 피와 살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선은 처음 나타난 것으로 후일의 일부 서정적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Green Violinist, 1923-24

The Falling Angel, 1923-47

첼로 연주가

드디어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서 또 한 번의 변용을 가져온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샤갈의
작품 속의 연인들이 아주 몽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환상 속에 이제는 어떤 괴기적 요소가 섞이기 시작한 것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비테프스크는 첼로를 켜는 인물 뒤에서 황량한 눈이 덮인 고장으로 되고, 혹은 다른 작품
<초록 눈의 집>에서는 건물이 눈을 번쩍거리기도 한다. 인간은 동물로 동물은 어떤 괴물로
각각 변모한다. 이 작품에서는 첼로가 샤갈 자신이 되고, 바이올린을 켜는 벨라는 조그만
송아지로 변하여 있다. 그들 자신이 화면에서 곡예를 하며 또한 다음 곡예를 예고하기도
한다. 특히 하늘이나 길에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마티에르, 얼룩지 듯 엮어간 화면의 질감은
앞서 제작한 판화집을 통한 기법에서 온 것이다.

Peasant Life, 1925

1923년 파리에 다시 온 샤갈이었으나, 프랑스의 자연미를 알게 됨에 따라 다시 살아나는
것은 고향의 산하였다. 이 작품은 1925년의 여름을 몽쇼베에서 지내면서 아름다운 그
풍광에 자신도 모르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농부와 말의 정다운 관계, 그리고 멀리 보이는 주막, 그 주막 앞
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담소하는 사람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춤을 추는 남녀 등 꿈결
같은 그리움이 맑게 흐르는 기억의 샘물처럼 그려져 있다.

The Three Acrobats, 1926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파 화가들이 서커스에 흥미 갖고, 그런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샤갈도 서커스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이 그림을 그린 전년
경 부터인데, 그는 후일 마술적인 세계, 고도의 포에지의 형(形)으로서 서커스에 자신이
끌렸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회화도, 언어도 결코 서커스의 정확함에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역시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정체는 정확함에
있다. 발레리가 말한 '댄스와 같은 정확함'은, 후일 원숙기에 전쟁, 혁명, 성서적 광경 등
을 그린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묵시록적인 혼돈과 거리가 멀다. 아크로바트의 정확도
를 나타내기 위하여 화면에 대담하게 인물을 배치하고, 큐비즘 분석의 정도(精度)와 결합된
호사하고 장식적인 화면을 만들고 있다.

La Mariee a Double Face(두 얼굴의 신부), 1927

Lovers with Flowers, 1927

The Bridal Couple, 1927-1935

The Rooster(수닭), 1929

동물들은 샤갈의 그림에서 중요한 주인공들이다. 그들과 인간과의 관계는 사랑의 법칙에
의해 이상적으로 지배되는 인간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The Woman(Chagall's wife, Bella) and the Roses, 1929

Lovers in the Lilacs, 1930

Solitude, 1933

Bouquet with Flying Lovers, 1934-47

White Crucifixion, 1938

Les Mares De La Tiur Eiffel(에펠탑의 부부), 1938-39

The Three Candles, 1938-40

Madonna of the Village, 1938-42

The Juggler(요술쟁이), 1943

1940년 파리의 독일군에 의한 함락과 유태인 학살 때문에 남불(南佛)로 피난을 했다가, 다음
해에 뉴욕 근대 미술관의 초청에 의하여 샤갈 부처는 미국으로 건너 간다. 그 다음 해인
42년에 수주일간 멕시코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아레코'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했다.
이 작품은 샤갈 자신의 현실적 내면을 무대의 극적 장면을 통하여 이야기하려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무대의 극적 장면도 서커스와 발레의 총합적 장면이다. 새 모양을 한 인물이
한 손에 시계를 걸치고 나타나, 뭔가 자기 정체를, 또는 어떤 다가오는 시간을 알리려는 듯
둥글게 된 무대 중앙에 지금 막 뛰어나왔다. 오른편에는 자그만 소녀가, 말 위에서 유도하
는 대로 말이 된 아가씨가 수줍음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다. 불길(不吉)을 느끼게 하는
환상미의 극치에 이르는 작품이다.

결혼의 영광, 1945

벨라의 죽음은 샤갈에서 있어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불행과 고독을 이겨내는 9개월간
그는 붓을 들지 못했고 온갖 그림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았다. 드디어 화가(畵架) 앞에 앉을
기력을 회복하여 처음으로 그가 손에 잡은 그림이 12년 전 그가 사랑에 잠겨 살 때 그린
<어릿광대> 이었다. 시집가는 신부를 거의 중앙에 그리고, 주위에는 여러 형상과 인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작품으로, 이 오른쪽 반쪽의 테마로는 <결혼의 영광>이라는 이 작품
을, 왼쪽 반으로는 <그녀에 대하여>라는 작품을 그렸다. 앞 쪽의 투명하고 짙은 푸른색에서,
밝게 멀리 배경의 위로는 신부의 모습으로, 그 주위에는 선회하는 듯 여러 형상을 둘러 싸게
한 이 구도는 혼례를 주제로 한 샤갈의 전(全)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에 대하여, 1945

이 작품은 샤갈의 애처 벨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그려졌다. 파리 해방과 더불어 파리
개방의 소식을 듣고 뛸 듯이 좋아하던 벨라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은 사람으로 그의 곁을
떠나고, 샤갈은 그 슬픔을 통하여 그녀와의 삶을 이 작품에서, 마치 스테인글라스의 작품
처럼 투명하고 심오한 색으로 표현했다. 푸른 밤의 중앙에는 초승달 빛을 받은 비테프스크
의 또 다른 밤이 둥글게 따로 박혀 있고, 이 둥근 조그만 지구를 아크로바트로 변한 딸
이다가 붙들고 있다. 전경에는 피안의 사람들을 봄으로써 그것을 상기하고 있는 듯한 벨라
의 표정과, 그 피안의 하늘에 시선을 주는 자기 자신의 역전한 얼굴이 그려져 있다.
중앙의 원은 초승달과 함께 해와 달을 상징하고, 이후 많은 작품에 음양(陰陽)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 기호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다. 샤갈은 벨라가 아주 행복하게 그려진
서커스 장면인 그의 초기 작품 <어릿광대>를 이용하여 이 그림을 창작하였다.
샤갈은 원래의 작품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그림의 부분들을 사용하여 그의 죽은 부인에
대한 추억을 담은 이 작품을 완성했다. 밝음과 어두움의 대조가 그림에 우울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La Mariee(The Bride), 1950

푸른 서커스, 1950

1924년부터 샤갈은 서커스를 통하여 많은 그의 심중을 이야기하려는데 열중해 왔다.
그는 그 주제를 때로는 많은 팟슈로, 혹은 아크와틴트의 판 형식으로, 또 유화로 많은 경험
을 했고, 또한 서커스는 그의 화면 공간을 그만큼 자유롭게 설정하는데 성공적인 주제이기도
했다. 그의 화면에는 <초록 눈의 집> 이후 자주 선량하고 우수에 찬 눈이 등장하고, 또
물고기가 등장한다. 투명도가 높은 푸른색 속에 그가 항상 그려오던, 이미 그에겐 일상성을
지닌 여러 형상들이 물 속에 잠기듯 깔려 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빨강과 노랑, 초록들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푸른색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이후, 이 몽상적이며 환상적인
랩소디 인 블루에 의하여 연인들의 로맨스를 물들일 것이다.

The Green Night(초록 눈의 집), 1952

샤걀의 초기의 작품들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우울한 어두움이 그 동안의 전쟁과 고독의
부조리를 통하여 풀어지고, 세계의 그늘과 융화되어 갔다. 그에게 있어 가장 정다운 회상의
대상이며, 몇 번이나 거듭 화폭에 나타나는 비테프스크까지도 이제는 유령의 마을처럼 그리고
있다. 낮을 비추는지 밤을 비추는지 구별이 되지 않은 초승달이 화면 광경에 초월적으로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주막의 현현한 거안은 젖어 동공이 흐려 있다.
이 무렵에 그린 그의 작품 속에 보여주는 그의 낙원의 동물들은 대부분 이빨을 드러내고,
물고기는 선혈을 벌겋게 흘리는 날개를 갖는다. 이 작품을 그린 해에 사랑하는 벨라를 잃었
고, 그래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집들, 고독하게 혼자 젖을 짜는 여인을 지켜보는 수호의 눈
으로서 자기 자신의 눈을 동공이 없는 채 부드럽게 나타내고 있다.

Exodus, 1952-66

십자가에 매달린 밝은 노란색의 예수는 어두움에 둘러싸인 유태인의 희생을 상징한다.
샤갈의 도상학에서 차지하는 예수 이미지의 중요성은 그의 종교적인 사고가 보편적인 범주
임을 제시해준다.

Le Quai de Bercy, 1953

Bridges over the Seine, 1954

Adam and Eve Expelled, 천국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 1954-1967

천사는 샤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그것은 다른 많은 선전적 모티프들 처럼
애매하고 변형적인 존재이다. 천사들은 신의 전달자로서 정신 세계와 물질계의 전통적인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존재로 사용된다.

Song of Songs III, 아가(구약 중의 한 편), 1960

니스의 마르크 샤갈 성서 미술관에 소장된 종교화 시리즈에 속하는 이 그림은 샤갈이 색채의
거장임을 잘 알려준다.

Music, 1962-63

Dance, 1962-63

Circus Horse, 1964

War, 1964-66

Portrait of Vava, 1966

바바를 위하여

'이제야 제2의 청춘이 열렸다.'라고 결혼식장을 나오면서 노화가(老畵家 65세)는 부르짖었다.
25세 연하의 검은 눈의 어여쁜 러시아 여성 바바를 위하여 이 그림이 그려져 그녀에 의하여
보존되고 있다. 샤갈의 바바에 대한 헌신의 정도는 감동적인 이야기거리가 될 정도로서,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검은 색을 배경으로 한, 유난히 정결한 얼굴과
시원하고 맑은 눈이 노란 말의 초록색 눈과 대조를 이루며, 과슈 특유의 수수한 맛을 풍겨준다.

The Parting of the Red Sea, 1966

모세에 의하여 홍해(紅海)를 가르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그라나파
를 위시하여 몇 몇 종교 화가들의 영감을 고취하기도 했고, 또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우리의
흥미를 돋군 적이 있다. 이 이야기를 샤갈은 그 나름의 대단한 구성법에 의하여 작품화
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 모세의 힘으로 바다를 두 쪽으로 갈라 해안과 해안 사이
에 길을 이루어 피난민을 건너게 하고, 신의 사자인 모세는 다시 되돌아와 그들을 뒤따라
절박하게 추격하여 온 파라오의 군세(軍勢) 위쪽에 서서 구름과 어둠을 내려 그 진격을
저지한다. 날이 밝아 모세가 그의 지팡이를 휘둘러, 신의 힘은 좌우로 갈라졌던 바닷물을
일시에 뒤덮게 한 광경을 그리고 있다. 강렬한 색 대비의 화면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하모니를 이루는 그의 원숙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Aleko, 1967

위대한 서커스, 1968

최만년(最晩年)의 샤갈 예술의 스타일은 무엇보다도 이 한 점의 작품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많은 서커스 작품을 남겼고, 또한 그의 독특한 환상을 서커스에 결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서커스에서 얻은 경험의 형태나 색을 다시 그의 다른 작품에 소화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흰색, 회색, 검정의 무채색 (無彩色)을 주조(主調)로 하고 그 속
에 군데 군데 유채색(有彩色)의 채도(彩度) 높은 투명색(透明色)을 놓았다.
화면의 여러 형상도 여태껏 보아오던 기호(記號) 상호(相互)의 결합이 전적으로 새로운
불가지(不可知)의 의미를 느끼게 해준다. 새는 땅에서, 말은 하늘에서 서로 성체 배수
(聖體 拜受)의 관계에 들고, 말은 천사와 결합되어 천사는 거룩한 손 위에 있다.
성속(聖俗)을 하나로 묶어 보는 이 양식은 서커스의 광경을 하나의 종교화로서, 그리고
긴장이 가득 찬 굵은 선은 그의 에칭의 인열선(引裂線)을 응용한 것으로, 그의 온갖 서커스
작품의 총합체라 할 수 있다. 샤갈의 가장 복합적인 작품의 하나인 이 그림에서 화가는
예능인들에게 경의를 보내고 있다. 세계의 상징인 중앙의 링에 한 천사가 신의 손에 이끌
려 나타나 지구와 천체의 중재자로서 광대, 곡예사, 악사, 그리고 재현이란 요술을 행하는
화가 자신을 축복한다.

부활제

'마티스 이후 샤갈만이 색이 무엇인가를 아는 유일한 화가가 될 것이다.' 이것은 피카소가
한 말이다. 샤갈은 물감의 순결이 심정의 순수와 일체화하려고 했고, 작품을 성실히 제작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하여 성실을 가지고 자기 표백을 하는 것을 염원으로 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색채의 폭력에 있다고 그는 생각하며, 그런 색을
'코에 역겹게 다가온다.'고 했다. 이 작품은 극히 억제된 색으로 별세계(別世界)의 깊이
를 강조하고 있다. 부활제의 헤브라이어의 원의(原意)인 '통과', 초월자(超越者)의 놀라운
통과를 이 천사는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 오른손을 올려 희생된 어린 새끼 양을 부르고,
가난한 에스파냐 사람들은 이를 환송한다. 모든 것이 여기서는 희생에의 축성(祝聖)을
낮은 소리로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부조리의 초극(超克)은 이리하여 최고의 축성(祝聖
consecration)의 의의와 합치된다.

푸른 얼굴

이 작품은 화면을 세로로 이등분(二等分)하여 그늘과 양지로 표현하고 있다.
7년전에 <푸른 얼굴의 여인>을 그렸는데, 같은 모티브로서 피리 부는 사람, 꽃들, 이러한
제재(題材)들은 60년 전 그가 초기에 붓을 손에 잡던 그 시절에 마음이 끌렸던 테마들이다.
그가 좋아하는 일체의 색들은 그동안 전쟁과 혁명을 통하여, 결국 역사가 화폭에 비극적인
상처를 남기고 지나갔으며, 다시 이렇게 하여 그 엘리멘트를 되살리고 있다.
그 동안에 샤갈은 판화와 스테인드글라스, 도예(陶藝) 등을 통하여 애당초부터 체질적으로
우러나던 그의 색채들을 갈고 닦았다. 그늘 속에 잠긴 푸른 얼굴은 잔잔한 호수 같고, 그
위에 삼각형의 더 깊은 심연을 이루는 순박하고 선량한 얼굴이 양지 쪽으로 꽃다발을 내어
밀고 있다. 건너편에는 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황홀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Rest, 1975

The Artist Above Vitebsk, 1977-1978

The Grand Parade, 1979-80

Marc Chagall, Photography, 1941/Carl Van Vech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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