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에꼴 드 파리

서양미술사67 에꼴 드 파리 - 모딜리아니

AH101 2012. 2. 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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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67(에꼴 파리: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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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꼴 드 파리(Ecole de Paris) - 귀족적인 우울, 애수:모딜리아니 ★

Self-Portrait, 1919

다른 화가들의 관례와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던 이른바 '만남의 화가'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이 작품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붓 놀림으로 자화상을 그렸다는 건 후대의 사람들을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이것이 유일한 그의 자화상이며 1919년 작품이다. 화가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델의 인상으로 보아 1920년 1월 24일
(그가 죽은 날)은 멀지 않은 것 같다.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태리)'를 남기고
보잘 것 없는 자선 병원의 침대 위에서 한 많은 이승을 등진다.

1884년에 이탈리아 리보르노에서 태어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1884~1920)
는 토스카나 마키아이올리(아카데믹한 회화양식
에 반대하여 새로운 화풍을 시도한 젊은 화가 그룹)양색의 그림을 배우던 중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뭉크, 들루즈, 로트레크, 클림트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1906년에 파리로 갔으나 도시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미술가들의 모임 변두리에 머무르면서, 세잔과 아프리카 조각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있던 야수파와 입체파 등의 어떠한 조직에도 가담하기를 꺼렸다.
수틴, 키슬링, 브란쿠시, 샤갈 등 그와 가까운 미술가들은 모두 동유럽 출신으로
그와 같은 유태인이었다. 폴 기욤, 리오폴트 즈보로프스키와 같은 갤러리 소유주
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예술적으로 고립된 채로 있었으며 슬픔을
거의 술로 달랬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할 만큼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여성 누드와 초상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만 열중했다.
1917년에 그가 전도유망한 미술가인 잔 에뷔테른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밝아졌다. 그러나 코트디쥐르에서 파리로 돌아오던 중에 모딜리아니
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는 1920년 1월 20일에 결핵성 수막염으로
사망했고 몇 시간 뒤 에뷔테른도 투신 자살했다. 이 열정적이고 절박했던 두 연인
은 페레 라쉐즈 묘지에 나란히 누워 있다. 그들의 장례식에는 파리의 모든 미술가
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15년 전 파리에 도착했던 이 재능있는 토스카나인의 위대
함과 시정을 뒤늦게야 충분히 깨달았던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한 것은 1906년 이후 파리화단에 진출한
후, 몽마르트의 집단 아틀리에 '세탁선'에서 피카소를 만나고, 1909년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브랑쿠시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모딜리아니는 이 두 사람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브랑쿠시의 영향으로 한동안은 오로지 조각,
그것도 두부상(頭部像)에만 열중하였는데, 이 때 조각에서 배운 단순하고 간결한
수법을 회화에도 그대로 적용하면서 독특한 자신만의 회화형식을 탄생시키게 된
다. 그의 회화는 세잔의 엄격한 조형성과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버리고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파악하는 입체주의 미학이었으며 또한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아프
리카 흑인조각의 이미지에서 성취한 다부진 표현력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고향 토스카나의 조형적 전통으로 이어지는 그의 고전적 기질
은 유별나게 유려한 선의 표현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여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며, 보티첼리나 베네치아파의 작풍과도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적 개성을 보여준다. 모딜리아니의 양식 중 또 하나의 특징은
초상화와 나부상(裸婦像)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주로 인물을 그렸으며 풍경
이나 정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서 인물화에 적용된 단순화되고
데포르마숑(Deformation:작가의 주관이나 특별한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대상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에 의해 고의로 왜곡 변형된 표현
기법)된 형태와 정묘한 색조는 그의 시인적 자질과 어울려서 해학적 재미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냈다. 비록 '에꼴 드 파리' 시절 몽마르트에서의 생활은
처절하게 가난과 싸우며 살아야했지만 그들은 가난 속에서도 자유롭고 정열적
이었으며 그런 속에서도 해학적 여유를 즐길 줄 알았다.

모딜리아니의 예술은 대부분 인간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인간,
특히 여성의 생명 속에 숨겨진 은밀한 움직임을 응시하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인간을 그린 화가로서 드가나 로트레크가 그린 여인과는 전혀 다른
여성을 자신의 독특한 데포르마숑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선배 화가들
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면서 거기서 생활과 인생을 그렸다면, 모딜리아니는 여체의
누드를 통하여 관능의 밑바닥에서 물결치는 듯 애틋한 순진함과 인간의 영혼의
소리를 듣고자 했는지 모른다. 모딜리아니는 잘 생긴 얼굴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음주와 기행의 숱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전설 속의 주인공이
었음에 불구하고, 실재 그 자신은 웃음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내성적인 예술가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누구보다도 지적 교양과 날카로운 감각을
함께 갖춘 작가로서 그 자신이 한 시대의 정상에 설 수 있다는 야망을 품은 자신만
만한 예술가였다.

미술사에서 모딜리아니를 얘기할 때면 여러 가지 평들이 거론되곤 한다.
심지어는 미술계에 등장한 화가 가운데서 가장 미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는 가난했으나 술을 좋아했으며, 때로는 마약에 중독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독과 우수에 가득 찬 파리 생활의 표정은 '오직 모딜리아니에 의해서만
이 표현될 수 있다.'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20세기의 빼어난 화가임에 틀림없다.
모딜리아니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화가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일관된 주제는 사람이다. 그는 초상화나 나부화 그리고 인물
이나 인체를 그렸다. 하물며 조각품도 모두 사람을 소재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헐값에 그림을 그리고 술과 마약, 방탕한 생활에
의지해 현실을 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난폭하고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비관적인
생활 속에서도 그의 붓끝에서는 따스한 애정과 연민속에 탄생된 다양한 인물들
이 호흡을 이어간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
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특히 모딜리아니만의 이 독특한 캐릭터들은 모딜리아니
가 원래 조각가를 꿈꿔 왔고 아프리카 원시 조각들의 형태들이 회화 속에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다. 또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형태를 왜곡시켰지만 가면
같고 평면적인 양식을 통해서 절묘하게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모딜리
아니의 탁월한 예술성을 입증해 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한 형태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세부적 묘사가 없는
배경을 통해 더욱 강한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다.
모딜리아니가 이처럼 독특하게 변형된 형태의 인물상을 완성시킬 수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흔한 초상화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는 모딜리아니가 그만큼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
했기 때문인데, 그는 작품 속에서 모델들의 삶과 인생의 깊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화가였다.

Head of a Young Woman, 1908

1906년 21세 때 파리로 진출한 모딜리니아가 23세 때 그린 작품이며, 그로서는
파리 정착 이후 첫 번째의 공식 작품이 되는 셈이다.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톤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
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 숑인 생(生)
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Study for The Cellist, 1909

한눈에 보아서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세잔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왼쪽 인물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 한다. 다만 그려진 첼로가 화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을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를 암유하는 듯
도 싶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조를 듣는다는 것인가. 역시 전기한 멜랑콜리의
읊음이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뒷면엔 브랑쿠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지로부터 조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웠으며,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면모가 뒷면에
그린 브랑쿠지(정면으로 된 크로키)의 옆 모습과 불가사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했다는 역사를 이
작품은 증명해 주고 있다.

頭像, 1911

<카리아티드>의 에스키스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당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는게 꿈이었고, 오른쪽의 두상은 1912년
살롱 도톤에 출품했던 일곱 점의 석상 가운데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그는 브랑쿠지와 립시즈로부터 조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육체적 피로
와 정신적인 긴장은 극에 달했었다고 한다. 폐가 나쁜 그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저버리지 못했으며 죽는 날까지 언제인가는 유명한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
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
카의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을 연상시킨다.

Caryatid(카리아티드), 1913/14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
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데스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이고 있다.

Portrait of Diego Rivera(디에고 리베라의 초상), 1914

현재 상파울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본격적인 유화는 아니며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초벌 그림 형식의 작품이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지만
리베라의 인물이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누르퉁퉁한 살갗과 몽유병 환자인
리베라는 어렸을 때 멕시코의 열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리베라는 사회의 도그머를
극도로 혐오했던 맥시코의 화가였다.

Portrait of Pablo Picasso(파블로 피카소의 초상), 1915

이 작품도 리베라의 초상처럼 두꺼운 종이 위에 그려진 습작풍의 작품이다.
이것은 리베라를 그린 다음해의 작품이며 모딜리 아니의 독자적인 양식이 극도로
제약된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수에 찬 조용한 서민들의 표정과는 달리 피카소의
눈은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앙드레 살몽과 피카소를 도움의
카페에서 자주 만났으며, '피카소는 우리들보다 언제나 2년을 앞서 있었다.'고 그
재기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딜리아니의 피카소는 여기서처럼 그시스 신화의 목신
처럼 그려져 있으며, 그처럼 급진적인 변모를 싫어했던 그의 중용적이고 고전적인
입장이 이처럼 피카소를 어떤 어두운 환영처럼 느끼게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Juan Gris, 1915

Portrait of the Painter Moise Kisling(1891-1953), 1915

모이스 키슬링의 肖像

1910년대의 파리는 '에콜 드 파리'의 전성기였다. 에콜 드 파리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서 각자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화가들의 모임을
이름한다. 고향을 떠나 온 미술가들이 객지인 파리에서 오직 자신들의 예술적 잠재만을
밑천삼아 그 내용을 신장하던 그룹을 뜻한다. 따라서 에콜 드 파리는 하나의 유파로서
의 미술 표지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서로 미술에 대한 견해라든가 주장은 다른 것
이었지만 고향을 등졌다는 이방인이라는 데서 이들은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노스텔지어의 이들은 숙명으로 했었다는 이야기이다.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온
유태인이며,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온 유태인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모태의 혈연
처럼 가까운 사이였다.

Madam Pompadour(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5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퐁파두르 부인은 본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1914~16)
비아트리스를 대용해서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비아트리스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
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광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하며 타일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
앉혔다고 한다. 그럴 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
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Bride and Groom(부부), 1915/16

모딜리아니의 전(全) 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립시즈 부처>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
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주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다.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Portrait of Paul Guillaume, 1916

장 콕도가 썼듯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그의 내적인 특성, 즉 유니콘의 뿔처럼 고귀하고
민감하며 민첩하고 위험스러운 우아함'을 반영한다. 모든 작품에서 관람자는 통찰력 있는
그의 감성에 감동받게 된다. 파리에서 가장 예리한 갤러리 소유자 중 한 명이었던 폴 기욤
은, 많은 외국 작가들이 거주하며 작업하는 근거지였던 몽파르나스의 라뤼슈에서 모딜리아
니가 치열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Portrait of Max Jacob(막스 쟈콥의 초상), 1916

막스 쟈콥은 브르타뉴 출신의 시인이자 미술 비평가로 당시의 파리 화단을 형성했던 주요
인물의 하나이다. 그도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사랑햇으며 폴 기욤이라는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즈보르스키처럼 관대한 이해자는 아니었으며, 얼마 간 이재
(理財)에 바른 시인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비아트리스와 동거하고
있을 때 자주 찾아 왔던 쟈콥은 모딜리아니의 무절제한 생활을 염려했고 그래서 제법한
화상을 그에게 소개하여 건실한 작가 생활을 영위하도록 권고한 것도 쟈콥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럴 때마다 '농담 말게' 하면서 이 연상의 이해자를 어렵게 만드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쟈콥은 비아트리스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쟈콥은 40이 넘은 대머리지만 모델의 지성과 감수성이 부드러운 표현으로
묘사되어 있다.

빌호르스키의 초상

이 작품의 모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사람이 마음을 가다듬고 앉을 때 보이는 그러한 유형
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자세를 회화로 표현할 때 자칫 굳어진 포즈로 재현될
우려가 있다. 가령 표현되지 않는 리얼리티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상은 그 자체로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은 회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미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미술가의 마음의 굴절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래서 성격적인 것이 된다. 미술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본뜨는
게 아니라 사람이 먼저 있고 다음으로 미술이 그 사람을 본뜬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퍼스낼리티로서의 모딜리아니의 표지가 빌호르스키에 의해서 여과된
변형이라고 해야겠다.

Portrait of the Painter Manuel Humbert, 1916

The Sculptor Jacques Lipchitz and His Wife Berthe Lipchitz, 1916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정착한지 꼭 십년이 되는 해에 제작한 것이다.
그의 본령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품이다. 전하는 말로는 이들 립시즈 부처가
자신들의 초상화를 부탁했을 때 모딜리아니는 한 번에 10프랑을 요구했다고 한다.
다음날 모딜리아니가 찾아와서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와 정확도로 이들 부처의 데생을
여러 장 그렸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과 같은 구도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들의 결혼 사진을 본 떠서 이러한 구성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붓을
놀리던 손이 자주 술병 있는 곳을 더듬더라고 한다.

Lalotte, 1916

반 뮈덴 부인의 초상

Seated Female Nude, 1916

Portrait of Chaim Soutine Seated at a Table, 1916

러시아의 리토아니아 출신은 스틴도 역시 유태인 미술가였으며, 1911년 파리로 나와
동국인이자 유태인인 샤갈과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는다. 남 프랑스의 세레라는 지방에
일시 정착하여 강렬한 원색만으로 뭉개듯 그리는 그의 광열적인 감정의 독자적인 작풍은
당시의 파리의 화단을 놀라게 한다. 이러한 그의 화면과는 정반대로 그는 투박하리만큼
순정의 사람이었다고 하며,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그의 순심에 깊은 애정과 우정을 느꼈다
고 한다. 쟌느 모딜리아니(모딜리아니 딸)는 아버지의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포즈는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으며, 높은 코와 두터운 입술은 두드러 지지만, 고뇌로 차
있는 눈길이 모델을 비극적일 만큼 고독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

Portrait of Woman in Hat(Jeanne Hebuterne in Large Hat), 1917

큰 모자를 쓴 쟌느 에퓨테른느

여학생처럼 청순한 처녀가 몽파르나스의 도톤(카페 이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았던 이 처녀는 모딜리아니 등의 예술가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는
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기도 했다. 들리는 말로는 그림 공부를 해보려고 몽파르나스에 온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이 청순한 처녀인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와 서로 팔짱을
끼고 몽파르나스 거리를 지나가는 정경을 사람들은 목격하게 된다. 드디어 모딜리아니도
행복을 잡았구나 하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생의 반려가 되며 앞으로
삼 년간 도톤의 맞은 편 그랑 쇼미 엘 거리에 셋방을 얻어 같이 살게 된다.
한때나마 안정된 시기가 찾아오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표현 양식은 급속도로 만개하게
된다.

Portrait of Anna Zborovska, 1917

폴란드의 옛 귀족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 난 즈보로스카는 1914년 유럽 대전이 발발하던
해에 파리로 피신했으며, 그후 파리장들은 그녀를 프랑스 식으로 안나라고 불렀다.
모딜리아니의 최상의 이해자였던 레오폴드 즈보로스키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동포에게 시집
가게 되며 앞으로 모딜리아니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부부가 된다.
이 작품은 이들 부부가 모딜리아니를 알게 된 일년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병약한 몸매의
즈보로스카였지만 그녀의 마음씨 고운 자태가 모딜리아니의 심상을 통해 불가사의할 정도
로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기품 있게 흐르는 목의 사선과 맑게 가라앉은 얼굴 표정이
검은 의상과 검은 머리의 대비를 통해 긴장된 구도로써 표현되어 있다.

Elena Pavlowski, 1917

Seated Nude on Divan(裸婦), 1917

이 작품의 원명은 <큰 나부>로 불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선 다른 나부의 경우와는 달리
그렇게 자율적 구성으로서의 회화를 강하게 느낄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의 벌거숭이
여인에 가까운 숨결을 느끼게 된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화가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린
작품이라기보다 젊은 남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그렸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의 독자적이고 유니크한 선맥의 흐름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으며 대신 나부의 얼굴 표정
으로 구성이 집중된다. 여체의 아래 부분을 손으로 가리고 얼굴의 표정만 보아도 이 여성
은 알몸이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결인 관능의 뜨거움이 와 닿는 듯
싶으며 서로 다른 구형(球形)의 모임으로 하나의 전체를 구성 하고 있다.

Reclining Nude from the Back(Nu couche de dos), 1917

Red Nude(Nude on a Cushion), 1917

모딜리아니는 1910년 파리의 베르트 베이유 갤러리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여성 누드가 걸려 있어 외설스럽다는 고발 때문에 몇일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Woman of Algiers, 1917

Jeanne Hebuterne in a Yellow Sweater, 1918

1918년은 쟌느가 임신한 해이다. 1918년 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따라서 모델이 임신
중임을 암시한다. S자 형의 구도는 조형상의 유연성을 겨냥한 것일 테지만 앞으로 닥쳐
올 어떤 불행을 풍겨 주는 듯만 싶다.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에게 시집 간 그녀는 붉은 기미의 밤색 머리와 대조적으로
흰 얼굴 빛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야자 열매'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조용한 성격의 여성이었다고도 전한다. 이해 11월말 니이스의 병원에서 쟌느는 딸을 출산
하며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준다. 충실한 반려자였던 그녀는 앞으로 만 일년 2개월
후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자 5층 창밖으로 임신한 몸을 던져 사랑하는 이의 뒤를 쫓는다.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 달라' 던 남편의 말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다.

Portrait of Jeane Hebuterne Seated in Profile, 1918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8

The Servant Girl(La jeune bonne), 1918

The Little Peasant(작은 농부), 1918

모딜리아니의 결핵이 악화되자 즈보로우스키 부처는 무리를 해서 그를 남 프랑스의 니이스
로 보낸다. 1918년의 일이었다. 지중해의 해맑은 요양지에서 오래만에 안정을 얻은 모딜
리아니는 제작에만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농부와 소년 소녀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모딜리아니는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며, 소박하고 건강하며
사랑스러운 농부 아들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있다. 이 밝음새는 당시의 모딜리아니의 삶의
건강성을 바로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겠다. 한편 이 화면에서 우리들은 세잔의 기법과
매우 유사한 터치를 발견하게 된다. 세잔을 존경했던 그는 남 프랑스의 적막한 전원 속에서
문득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농부의 그림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Man with Pipe (The Notary of Nice), 1918

파이프를 가진 니이스의 노인

이 작품 역시 니이스 체재 중에 그린 것이며 매우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파리의 즈보로우스키에게 보낸 이 무렵의 모딜리아니의 편지를 보면 당시의 그는 제작에
만 열중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만년의 그의 주옥 같은 걸작들이 제작된 것은 그의 말
처럼 여기서의 일이며, 그는 남프랑스인들의 소박한 모습들을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의 화면의 구성은 마치 용암처럼 불쑥 솟아으?듯한 붕기가 엷은 오렌지 색을
배경으로 간결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처리되어 있다. 살짝 얹어 놓은 듯한 뱃사람
모자로 미루어 보아 이 노인은 니이스의 바닷가 사람인 것 같으며, 길쭉한 담뱃대가 얼마간
과장된 손의 구도를 조절해주고 있다. 선량하고 소박한 인물이 무언가 이야기해 올 것만
같다.

남프랑스의 풍경

사람만을 그려왔던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이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그는 풍경화를
미술의 장르가 아니라고까지 경원했으며, 자연은 미술가가 참여하는 곳이 못 된다고까지
극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핵을 치유해 주는 요양지인 남프랑스의 해맑은 대기는
얼마간 오만했던 그의 인간 본위를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 오직 4 점의 풍경화만 그렸다.) 한눈에 세잔의 기법을 연상시켜 주는 이 작품은 이를
데 없이 간소한 풍경화이다. 해안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한 채의 집과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여느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임은 그의 인물처럼 그의
마음이 거기에 투영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Gypsy Woman with Child, 1918

섬세한 선묘와 얼마간 즉흥적인 터치의 관례적인 화면과는 달리 이 작품은 비교적 두꺼운
마티에르를 가지고 있다. 흰 바탕의 수병복의 자주색 칼라가 화면을 긴장시키고 있다.
이 모델의 주인공은 집시이고 마약 중독으로 집을 뛰쳐나온 여자였다는 풍문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때로 자신의 선묘 때문에 화면이 그 표면성에서 튕기듯 가벼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그의 일회성(一回性)으로서의 섬세한 선조(線條)가 마음
처럼 되어 주지 못했던 것 같으며, 그 결과로 두꺼운 겹칠이 불가 피했었는지도 모른다.
아기를 안고 애처로울 정도로 고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여자가 풍문처럼 집시였다면,
고향은 있지만 나라가 없는 세파르당의 후예로서 자신의 처지를 그녀의 모습에서 모딜리
아니는 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Portrait of the Polish Poet and Art Dealer Leopold Zborovski(1889-1932),1918

레오폴드 즈보로우스키의 초상

즈보로우스키는 폴란드 귀족의 후예이며 문학 공부를 위해 파리의 솔본느 대학으로 온
시인이었다. 최종적으론 화상이 되지만 당시 화가들을 등쳐 먹는 화상들이 우글거리던
몽파르나스에서 즈보로우스키 부처만은 진실로 모딜리아니의 예술을 이해했고 그의 예술
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걸다시피한 갸륵한 인품이었다. 1916년에서 1919년
까지의 모딜리아니의 작품의 거의는 즈보로우스키의 원조 밑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 대해 웨르나의 매우 적절한 해설을 인용해 보자.
'이것은 모딜리아니의 가장 성공한 작품의 하나이다. 즈보로우스키가 실제로 가지고 있었
던 정신과 영혼의 고귀함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이야말로 진실된 우정의 표시
이다. 늘어진 콧수염이며 정돈된 턱수염 그리고 유연하게 기운 어깨의 키 큰 우아한
사람...'

Girl with a Polka-Dot Blouse, 1919

부채를 가진 루니아 체호우스카

모델은 즈보로우스키 부처의 친구이며, 기품있는 몸매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는 이 여인을 삼십 회 가량 그렸고 이 작품 외에 비교적 모델의 외형을 충실
하게 뒤쫓은 초상이 또 있다. 그녀의 부친은 폴란드인이었으며 혁명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남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러한 인과가 그녀를 사려 깊고
조용한 신비의 여인으로 성장시켰다고도 전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 이상으로 그를 사모
했던 것으로 전해지며 '쟌느 에퓨테른느가 모딜리아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것은
신성한 일이었다.'고 자신의 애정을 돌려서 고백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최만 년의 걸작을 대표하며 모딜리아니의 독자적인 데포르마숑은 거의 완벽한
경지까지 도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겠다.
모딜리아니의 신변에 있던 증인의 한 사람이었다.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Jeanne Hebuterne with White Collar, 1919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Portrait De Madame Hebuterne,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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