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93 페미니즘 : 오 키프, 신디 셔먼

   

서양 미술사 - 93(페미니즘: 오키프, 신디 셔먼)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


미국의 대표적 여성미술가인 오키프는 컬렉터이자 사진작가인 스티그리츠의
부인으로도 유명하다(Alfred Stieglitz 1864-1946).
미국 위스콘신주 선프레리 근처 농장에서 태어나 1904 시카고 미술학교,
1907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으며 상업미술 활동을 했다.
1912~1916
년에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16
사진작가인 앨프레드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소묘를 보고 작품성을
인정하여 화랑 '291'에서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들은 1924 결혼하였고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업을 항상 격려해 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를 모델로
수백 점의 연작 인물사진을 찍었다. 그후 그녀는 뉴욕과 뉴멕시코에서 살다가
1946
스티글리츠가 죽자 뉴멕시코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오키프는 정밀주의적 화풍을 보이는 수채화로 유명한데, 주제는 조개 껍질, ,
두개골, 골반 , 바위 산등 자연의 형태를 확대시킨 것들이다.
탐구적이고 미묘한 율동을 지닌 윤곽선으로 이러한 형태들을 그리고 위에
선명한 색채의 엷은 물감으로 강약을 부여했다. 신비스런 암시를 던지며 감각적
이면서도 상징적인 해석을 가능케하는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신체 일부를 연상
시킴으로 패미니즘적으로도 또는 남성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상당히 관능적인
매력이라는 두개의 상반된 기능으로 작용한다. 평생을 뉴멕시코 경계에 살았던
그녀는 주변의 자연을 주로 소재로 삼았던 점에서 자연주의와 일치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 작품에 대한 평가는 항상 엇갈린다.
최근 패미니스트 계열에서 활발하게 거론되는 그녀의 작품은 여러가지 의미를
더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키프 자신은 그녀가 패미니스트들과 함께
거론되는 것을 상당히 거부하는데, 자신이 의식적으로 여성임에 대해 전혀 염두
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때론 "나를 도와준 전부 남자들이었다"라고 말하는
성적 분류에 대한 반감마저 갖는다. 그러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이러한 의도와
달리 분명 그녀 작품 안에는 당시 패미니즘 미술의 의미를 발견할 있는
같다. 작품 안의 여성성의 결부는 관객들에 의해 부과된 것인데, 특히 비평가들
오키프 그림을 보고 " 아기가 갖고 싶어요"라고 외친다고 평가함으로 더욱
같은 의미가 증폭되었었다. 그녀 작품의 , 표면 질감들이 상당히 성적,
또는 관능적 감각을 유발시키는 것은 사실인데, 때로는 성기의 노출과 같은
표현을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이리스 Iris >에서 보이는 꽃의 형상이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살았던 지역에 대한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작업했는데,
시간과 대지가 여인이나 자연 풍경을 마치 변형되는 것처럼 보여주기도
한다. 여성 작가들은 자기가 사는 대지나 환경에 대한 애정이 상당히 높고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영향 준다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대지는 ""으로 세계를 다스리는 권력을 생산한다라고 했는데
바로 여성이 선사시대 이래로 이어지는 자연숭배와 대지 경외의 주체로
자리잡음은 자연에 가깝고 힘의 근원을 성의 서열적 도식에서 탈피하여 여성이
이어가고 있음이다. 이렇게 도외시 되었던 여성에 대한 찬양과 축하의 향연이
다시 시작되는 사건을 7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 있다.

오키프는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후기 작품은 주로 뉴멕시코의 맑은 하늘과 사막 풍경을 그렸고,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Red Canna, 1923*

*Grey Line with Black, Blue and Yellow, 1923*

*Light Iris, 1924*

*Oriental Poppies, 1927*

*Shell No. 1, 1928*

*Jack-in-the-Pulpit No. II, 1930*

*Jack-in-the-Pulpit No. III, 1930*

*Jack-in-the-Pulpit No. IV, 1930*

*Jack-in-the-Pulpit No. V, 1930*

*Jack-in-the-Pulpit No. VI, 1930*

*Cow's Skull With Calico Roses, 1931*

*The Shell, 1934*

*Sunflower, New Mexico I, 1935*

*Cottonwood III, 1944*

*Goat's Horn with Red, 1945*

*Cebolla Church, 1945*

*Dark Tree Trunks, 1946*

*Sky Above White Clouds I, 1962*

신디 셔먼(Cindy Sherman: 1954~ )


미국의 여류 사진 예술가로 1954 미국 뉴저지주 글렌리지에서 출생하였다.
흑백사진이 개념미술에 차용되던 1970년대에 팝문화를 기반으로 대중문화와
매체에 관심을 갖고, 1977 《무제 사진 스틸》 시리즈 작업을 시작하였다.
1950~1960
년대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을 패러디한 시리즈는,
미국적 아이콘인 금발머리의 여배우로 변장한 신디 셔먼(Cindy Sherman)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카메라의 뒷면이라는 관음자적 모더니즘 주체가 아닌,
카메라 앞에 나와서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체를 있다.
, 사진가(관람자) 시각에 모델(객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품의
모델이 되어 시선의 주체와 객체를 모두 담당했다. 이와 같은 독특한 역할은
1970
년대 비평을 선도했던 《옥토버 October》지의 주요한 비평의 대상
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주제별로 대략 5단계로 나누어진다. 1975~1980년대
초기는 '흑백스틸' 작업 시기로서, 금발의 여배우로 분장한 신디 셔먼이 등장
하는 《무제 사진 스틸》 시리즈가 제작되었다.
번째 시기(1983~1984) 패션모델을 패러디한 《패션사진》시리즈
제작 시기로, 여기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 아닌 추하고, 피곤한, 역전된
여성의 모습을 포착한다.
1985~1991
년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시기이다.
애브젝트 아트(Abject Art)라고 하는, 신체와 관계된 액체 분비물·정액·혈흔·
토사물 등의 불쾌한 것들로 작품을 만들었다. R.크라우스는 작품들을
'
재난들과 동화들' '역겨운 사진들' '시민전쟁'이라고 불렀다.
특히 주목되는 작품은 《무제 #153(1985)인데, 텔레비전 드라마 《트윈
픽스》의 장면인 강가 모래밭에 길게 누운 젊은 여성의 시체와 똑같이
연출한 장면이다.
번째 시기(1988~1990) '역사 초상화' 패러디한 시기이다.
고급 모더니즘으로 상징되는 15~19세기 후반 유럽 귀족의 초상화를 가슴을
드러내거나 평범한 여성 등으로 대중화시켜 패러디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마지막 시기인 1992년은 절단된 마네킹의 사지가 등장하는 마네킹과 섹스
사진이 특징이다. 유명한 《무제 #250(1992)에는 노인의 마네킹이
성기를 노출한 임신한 몸을 흉측하게 드러내며 누워 있다.
1997
년에는 영화 《오피스 킬러 Office Killer》를 제작하여 할리우드를
선망하는 여성의 허무한 모습, 불혹에 이른 아역배우, 40 후반의 중산계급
중년여성 등을 묘사하였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머리, 성형수술의
후유증을 상징하는 듯한 플라스틱 인조 가슴, 추한 화장과 의상 등으로 묘사
되는 여성의 외적 이미지를 보여주어 삶에 찌든 할리우드의 이면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여성' ''이다. 신체라는 외부 이미지를
넘어서 여성 신체를 구성하는 내부 이미지를 묘사한 오브젝트 아트에 이르기
까지 여성의 신체는 셔먼 작품의 근원이다.
여기에는 모더니즘과 가부장적 남성 사회가 단지 아름다움으로 규정했던
여성의 신체를 불쾌감을 주는 신체 내부적 요소로 보여줌으로써, 변장 뒤에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여성의 진정한 자아확립과 주체회복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

*무제 스틸 #13(Untitled Film Still #13) by Cindy sherman*

*Untitled Film Still #15, 1978*

*Untitled Film Still #48, 1979*

*Untitled Film Still #50, 1979*

*Untitled #71, 1980*

*Untitled #76, 1980*

*Untitled #86, 1981*

*Untitled #96, 1981*

*Untitled #98, 1982*

*Untitled #123, 1983*

*Untitled #153, 1985*

*Untitled #272, 1992*

*Untitled #323, 1995*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는 세계 미술의 최신 흐름을 발빠르게 선보이고 있다.
현대 여성사진가에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없는 신디 셔먼과 한참 맹활약 중인
바네사 비크로프트가 주인공들이다.
전시 제목 'HER BODIES' 언뜻 문법에 맞지 않는 문구이지만 분명 상상이 되는
제목이다. 이렇게 15년의 나이 차이를 가진 작가들임에도 불구하고 갤러리에서
두여성 작가의 작품을 전시로 묶어 보여줄 있게 계기는 제목에서도
있듯이 그들의 작품이 모두 여성의 몸을 기본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신디셔먼은 1970년대부터 30 동안 다양한 캐릭터의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
시키는 연출사진을 제작해왔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작품 <미스터리 살인
인물들(Murder Mystery People)> 현재에는 없는 17점의 세트작품으로
이후 제작되는 '무제(Untitled)'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작품들과는 약간의 차이를
지닌다. 스튜디오의 선이 정리되지 않은 드러나고 그림자 처리가 되지 않은
조금은 엉성한 듯한 그녀의 초창기 작업으로 눈여겨 볼만하다. 또한 전시 작품
<
무제 #224(Untitle #224)> 역사 인물 초상 시리즈 가장 논의가 많이 되고 있는
작품으로 미술사 속의 거장 '카라바지오(Caravaggio)' <병에 걸린 바쿠스>
떠올리게 한다. 카라바지오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은 신화속의 인물
바쿠스의 의상을 입고는 있지만 해쓱한 얼굴과 더러운 손톱으로 사실성에 충실한
작품이다. 셔먼은 카라바지오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재연출 해낸다.
2000
년도로 들어서면서 셔먼은 중년여성의 과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
무제 #357 (Untitled # 357)>같은 작품들이 그것인데, 이상 '예쁘다'
없는 사진 여성들의 과장된 메이크업과 가식적인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북한 느낌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중년여인 시리즈는 셔먼의 최근 작업인 광대시리즈로 연결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최근 2004 작품 <무제 #425 (Untitled #425)> 점이
컬렉션 되었다. 광대 시리즈는 컴퓨터기법을 이용하여 각각의 광대 이미지들을
하나의 화면속에 구성하였다. 지금까지400 이상의 작품에서 캐릭터들을
실험해 셔먼의 작품 세계가 '광대'라는 인물로 집약되어 보여진다.
광대시리즈는 작가로서 셔먼이 재현하고 있는 여성이미지이며 동시에 중년으로
넘어선 셔먼 자신의 모습임을 눈치챌 있어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셔먼의 작품이 작가가 연출한 여성 이미지라면,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작품의
여성들은 실제 여성들이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52회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가져온 바네사 비크로프트는 가장 유망한 현대 여성작가 명이다.
회화 같기도 조각 같기도 그녀의 작품은 자체로 조형적 특성을 지니며 전체
구성을 형성하는 살아있는 누드 퍼포먼스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며진 누드 모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피곤에 지쳐 주저 앉거나 눕기 시작 모델들의 벗은 몸은 이상 눈요기거리가
아닌 그저 벗고 있는 몸이 된다. 꾸며진 몸에서 거짓 없는 몸으로, 여기에 퍼포먼스의
전략이 있다. 사진과 비디오 작품으로 남겨지는 그녀의 작품들 , 아라리오 갤러리
에는 작가의 의붓 자매를 모델로 "시스터 캘린더 (Sister Calender)" VB45,
VB47, VB48, VB52
사진 작품 20 점이 전시 된다.
한국에서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가 한번도 성사되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하여
아라리오 갤러리에서는 다방면으로 그녀의 퍼포먼스 기획을 검토했으나, 누드
퍼포먼스에 대한 국내 인식 부족과 작가의 개인적 사정에 의해 실제 퍼포먼스는
무산되었다. 하지만 VB48 기록한 비디오 작품이 전시되기에 실제 퍼포먼스가
주는 감흥을 갤러리를 찾는 모든 관객들이 경험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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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22 낭만주의 제리코, 들라크루아

   

제리코(Jean Louis Theodore Gericault: 1791~1824)

1791
프랑스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P.P.
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816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대작
《메두사호() 뗏목》(1819)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실감을 살린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있다.
1820
영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 독립전쟁·노예제 반대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
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1822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An Officer of the Imperial Horse Guards Charging(왕실 근위대의 장교),1812*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병,1814*

*에프손의 경마,1821*

*The Raft of the Medusa,1819*

그림은 배가 침몰한 뗏목을 타고 죽음과 굶주림 속에서 바다를 표류
하다가 구조되는 선원들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메두사호는 1816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냈는데, 결국 선원과 승객 149 15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무자격 선장이 운행을 탓에 일어나게
사건은 굶주림, 병마, 갈증, 악천후를 겪으며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동정을 일으켰다. 제리코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파선의 몸체를 연구하고
실제로 목수를 시켜 뗏목을 만들게까지 했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살을 먹은 이야기며, 죽어 가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제리코는
병원에서 시체와 병자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돛을 배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터번을 남자는 사람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매고 있으며, 뗏목 여기저기에는 시체들이 흩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돛대로 보이는 물체가 나타나자 물통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구원의 요청하는 사람들이 보이며, 환자들도 이에 일어나려 애쓰는
장면들이 보인다. 제리코는 그림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에 사람들이
표류 끝에 구조를 받게 되는 순간의 환희를 담으려고 했다.
거대한 캔버스에 담긴 작품은 대각선이 서로 교차하는 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들의 동작 또한 개성적이며 다양하다.
1819
살롱을 발칵 뒤집어놨던 작품은 호평과 동시에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악평을 함께 받으면서 제리코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
메두사의 뗏목> 후에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미술을 절정에 이끌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Portrait of a Kleptomaniac, 1820*

*Man with Delusions of Military Command, 1819-22*

*The Woman with Gambling Mania,1822*

1824 제리코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시기인 1822년에서 1823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조르주의 부탁으로
미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정신 의학계에선 미친 사람들은 얼굴 모습
골상학에 있어서 특정한 유형을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환자들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겼다.
작품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도박에 편집증을 갖고 있는 여인을 그린
것이다. 여인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제리코는 초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정상인과
다른 광인(狂人)들의 심리적 불안과 망상까지 포착하고 있다.
제리코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도박과 술로 황폐해진 삶을 추스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비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Madwoman*

들라크르와(Ferdinand Victor Delacroix: 1798~1863)


프랑스의 화가이며 샤랑트현() 모리스 출생이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
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 관립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
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
에도 노력하였다. 1819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 뗏목:
Raft of the Meduse
》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 고전
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있다.
계속하여 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31) 대작이다.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리의 여인들》은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 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
(
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자신의 영향은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 국회 하원도서관, 국회 상원도서관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
《햄릿 석판화집》등의 걸작을 남겼다.

*앉아 있는 누드, 로즈 ,181720*

들라크루아는 나부를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
앉아 있는 누드, 로즈 > 비롯한 점의 누드화를 남겼다.
작품은 25 그린 나부 습작 중에서 가장 치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작품으로, 입체감있는 인체의 표현이 사실감있게 그려졌다.
그림의 실제 모델은 "로즈" 알려져 있다.
받침대 위에 자연스러운 포즈로 앉아있는 여인의 자세는 고전주의
경향을 탈피한 흔적이 엿보인다. 들라크루아는 실제 모델이 주는
인상이나 느낌을 건강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솔직하게 표현
하였다. 배경은 당시 신고전주의자들의 작품처럼 매끈한 것이 아니라
물감의 농도를 달리해서 칠해졌는데, 고르지 않은 느낌이 독특하다.
이는 모델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는 효과와 함께 단조로운 화면
구성을 깨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로 비쳐진다.

*The Barque of Dante,1822*

*Orphan Girl at the Cemetery,1824*

*키오스 섬의 학살,1824*

작품은 1824 번째로 살롱에 입선하였는데, 당시 같은 살롱에
출품했던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서원> 매우 대조적인 화풍을 보여
주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화단은 앵그르가 이끄는 고전주의
계열과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낭만주의 계열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그림은 그리스의 키오스 섬이 터키 군의 습격을 받아 민가는 모두
태워지고, 남자는 살육 당했으며, 여자들은 약탈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잔인한 사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담아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림 전면에는 지쳐서 누워버린 키오스 사람들을 체념과 고통
고뇌가 뒤섞인 표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여자를 납치해가려는 터키
기마병들의 잔인한 장면을 화면 왼쪽에 담아, 처참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감을 부여하였다. 이들 뒤로 불타오르는 민가와 전투로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검붉은 바다와 황혼이 지는 짙은 저녁 노을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적막함이 그림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받쳐주고 있다.
죽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와 여인들의 공포 섞인 울부짖음, 눈을 뜨고
죽은 이의 멍한 표정을 묘사하면서, 들라크루아는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더욱 생동감 있는
주제로 재현해 내었다.

*The Death of Sardanapal,1827*

작품은 사르다나팔의 비참한 최후를 다루었으며, 환상적인 이국 정서
사랑과 비극이 어우러지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기원전 7세기경 앗시리아의 왕인 사르다나팔은 적에게 포위되어 2
정도를 궁전에 갇혀 살게 되었다. 적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에
쳐들어오기 전에 사르다나팔은 그의 애첩들과 애마를 모두 죽이고,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군데에 모아 불태운다.
그리고 스스로도 속에 타죽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림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라크루아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환상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사르다나팔 왕이 기대어 누워 있는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는 관능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당하는 광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코끼리 머리 장식은 붉은 빛의 피로 물들어 있으며, 방바닥에 온갖
보물들이 어질어 있는 화면 왼쪽에는 흑인 노예가 백마를 끌고 안으로 들어
오려 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펼쳐지는 대각선 구도
속으로 격정과 죽음에 대한 고통을 미켈란젤로의 형식미로 표현했으며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광란의 장면을 지켜보는 사르다나팔의 우울함과
더불어 죽음에 몸을 뒤트는 여인의 풍만한 관능미는 에로티즘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면서, 사르다나팔의 이야기를 뛰어난 환상미로
표현하고 있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1830*

그림이 완성되었던 1830, 7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 혁명이
일어났다. 7 혁명은 3 동안 계속 되고, 8 3일에 이르러 필립이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자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
었으며,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 말하고 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
자유" 대한 공감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
있는데, 그녀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 있다. 반쯤 흘러내린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죽은 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후면으로 피어 오르는 안개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색채를 배경으로 삼아 밝게 빛나는 여신과 강렬한 대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혁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얀 양말을 신은 나부,1830*

화면의 대각선상으로 누워있는 여인은 침대 위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양말만 걸친 채로 묘사되었다. 밝은 광선이 가슴으로부터 전신을 감싸고
하얀 침대 시트의 반사로 인해 모델의 모습은 강하게 부각되는데, 빨간 커튼이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강렬한 배경으로,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나부의 몸은
한결 돋보인다. 그림 전경을 향해 튀어나올 듯한 다리에 신겨있는 하얀
양말은 그림의 중요한 액센트가 되는데, 그것은 그림의 모델의 신분이
평범한 여인은 아닐 거라는 추측과 더불어 관능미를 불러일으킨다.
대범한 붓터치와 간결한 선처리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빨강과 짙은 녹색의
배합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뛰어난 색채 효과를 내고 있는 작품이
매끄럽게 흐르는 여인의 몸을 통해 새로운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화가의 열정이 드러나 있다.

*Algerian Women in Their Apartments,1834*

*Self-Portrait,1837*

*Fanatics of Tangier,1837-38*

*프레드릭 쇼팽의 초상,1838*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1840*

*제니 귀유의 초상, 1840*

*Pieta,1850*

*Heliodorus Driven from the Temple,1854-61*

*Arab Saddling his Horse,1855*

*Odalisque, 1857*

*The Abduction of Rebecca,1858*

*Arab Horses Fighting in a Stable,1860*

*Arabs Skirmishing in the Mountains,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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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29 라파엘전파:Waterhouse

   

12. 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

19
세기 중엽(1848)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결성된
영국의 사실주의 운동으로 라파엘 이전처럼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는
예술을 표방한 유파이다.
라파엘전파는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다니던 윌리엄 홀먼 헌트 William H. Hunt
에버렛 밀레이 John E. Millais,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Dante G. Rossetti
등을 중심으로 J.콜린슨, T.울너, F.J.스티브슨 7명으로 결성되었다.
기법적으로는 당시 자연신학적인 과학사조를 반영하고 자연에의 침잠
과학적인 정확함과 현미경적인 세밀함을 추구하였다.
또한 태양빛 아래에서의 발고 맑은 색채를 재현하기 위해 혼합한 백색을
밑바탕으로 칠하고 위에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는 수법을 개발하였다.
깊은 내적 의미를 가진 주제를 선명하게 묘사하고, 작가는 서명과 함께 PRB라는
이니셜을 넣어 작품을 발표했다. 한편 기관지 <맹아> 간행하여 미술뿐만
아니라 시분야에 까지 그들의 주장을 펼쳤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운동을 부채질했던 사회적, 예술적 혁명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서는 종교적인 열정의 형태로 나타났다.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당시
영국미술의 퇴폐성에 반기를 들고 라파엘로의 후기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전
플로렌스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성행했던 경헌하리 만큼 직접적이며 소박한
자연주의를 본보기로 삼는 혁신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이것은 그보다 30 전에 일어났던 독일의 나자렛파들과 다소 유사한 데가
있지만, 위의 7명들이 힘을 합쳐 라파엘전파 교우회라는 개혁을목표로 비밀
예술단체를 결성했다. 수도승 같다고 수는 없겠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라파엘전파 교우회는 전래의 모든 매너리즘적이며 바로크적인 기교를 삼가고
소박함과 정확한 질감, 색채,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의 윤곽선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충실성을 지니고서 가치있는 , 나아가 기독교적인 주제에서 진실을
찾고자 했다. 전통적인 자연주의의 부드러운 명암 대조법식의 생략, 율동적인
붓질, 몸동작의 우아함은 사라지고, 마치 예술가 자신이 추구하는 환영주의 역시
거짓된 것임을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세부에 한결같은 주의를 기울여 도처의
환영주의를 붕괴시키는데 기여하는 다소 볕에 그을리고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신선한 관점의 자연주의에 대해 대체되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술평론가인 러스킨 John Ruskin 유파를
옹호했으나, 불명확한 주장과 주제의 통속적인 해석 번거로운 묘사법 때문에
당초의 목표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나아갔다. 1854년부터 작품을 함께 전시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활동하게 되어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화풍은
1850
년대와 1860년대 초반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모방하였다. 예술운동의 후기 단계는 존스의 그림에 요약되어 있다고
있는데 그의 작품들에는 약간 진부하지만 서정적인 중세풍의 감각적인 느낌이 종종
가미되어 있다.

John William Waterhouse: 1849 ~1917

19
세기 영국 화가로 1849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부모가 모두 미술가로서
활동하였다. 로마에서 자라면서 이탈리아 미술의 세례를 받은 것은 이후 신화적
소재나 문학적인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그의 미술에 결정적인 자취를 남기게 된다.
부모가 영국으로 돌아간 뒤에 부친의 작업실에서 미술을 공부하였고, 1870년에
로열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알마 태디마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지만 이후 좀더 시적인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특히 빅토리아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인 테니슨(Alfred Tennyson) 시와 호메로스(Homeros)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 작품의 소재를 구하였다. 1891 무렵
여인을 모델로 삼게 되었고 이후 그의 주요한 작품에서 여인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의 명성은 높아져서 존스(Edward Coley Burne Jones)
레이턴경(Lord Frederick Leighton) 비견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고전주의적인 주제를 추구하면서도 이상적인 여인상을 추구하였으며
사실주의적인 기법을 사용하였다.

*La Fileuse - 1874*

*Diogenes - 1882*

*The Lady of Shallot,1888*

*Cleopatra - 1888*

*Lady of Shalott - 1894*

*Ophelia - 1894*

*The Shrine,1895*

*St.Cecilia,1895*

*Hylas and the Nymphs,1896*

*Pandora,1896*

*Mariana in the South - 1897*

*Ariadne -1898 *

*Awakening of Adonis, The -1900*

*The Flower Picker,1900 *

*The Siren,1900*

*A Mermaid,1901*

*Boreas -1902*

*Crystal Ball - 1902*

*Echo and Narcissus,1903*

*Destiny,1900*

*Nymphs Finding the Head of Orpheus - 1900*

*Windswept - 1902*

* The Danaides,1904*

*Psyche Entering Cupid`s Garden - 1904*

*Dante and Beatrice*

*Apollo and Daphne -1908*

*The Soul of the Rose / My Sweet Rose,1908*

*Gather ye Rosebuds while ye may - 1909*

*Ophelia - 1910*

*Narcissus - 1912*

*The Annunciation-1914*

*`I am Half-sick of Shadows`, said the Lady of Shalott - 1915*

*The Enchanted Garden,1916 *

*Miranda - The Tempest - 1916*

*Tristan and Isolde with the Potion - 1916*

   

   

The Awakening of Adonis 

(50 Kb) 

   

Destiny 

(30 Kb); Bridgeman Art Library at London 

   

Ophelia 

(30 Kb) 

   

My Sweet Rose 

(30 Kb); Bridgeman Art Library at London 

The Shrine 

(40 Kb); Bridgeman Art Library at London 

Echo and Narcissus 

1903 (140 Kb); Walker Art Gallery at Liver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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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38 후기인상주의: 세잔

   

   

   


15.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Self-Portrait, 1879-1882/Paul Cezanne

신인상주의와 같은 시대에 인상주의의 맥락에서 좀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지향한
또 하나의 경향으로 후기인상주의(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
가 있다. 세잔, 고갱, 고흐는 후기인상주의의 3대 화가라고 부른다.
고갱과 세잔이 인상주의 그룹전에 여러번 출품하면서 그들 화업의 출발을 인상
주의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을 인상주의의 후계자로서 그러나 새로운 인상주의자
로서 취급하는 것이다. 후기인상주의 명칭은 영국평론가 로저 프라이 Roper
Fry가 1910~11년 겨울에 런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개최한 전시회인 '마네
와 후기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 아주 막연한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비롯하여 인상주의의 색채에 영향을 받은 계승이자 단지 시각
효과를 넘어서 작가적 색채가 주관에서 비롯되는 각기 특징적인 주의로서 극복
의 뜻을 담는다고 하겠다.

후기인상주의는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되어
보다 견고한 화면구성을 추구하였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인상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변화를 일으키는 속성을
가진 변함없는 자연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주의를 지향하며작가
의 강한 개성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쇠라가 과학적 분석과 주관적 회화
구조를 통해 인상주의의 순간적 인상을 견고하게 만들었다면, 세잔은 자연을 통해
회화적 질서와 구성을 화면위에 재창조함으로써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세잔은 자연의 생생한 외형에서 느끼는 감각과 주관적인 이해를 통한 자연의 본질
적 구조를 표현하여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쇠라나 세잔이 자연세계를 주관적 화음과 질서로 통일하여 독립된 새로운 리얼리티
를 추구였다면 고갱과 고흐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산업사회 이면에 감춰진 모순으로 인한 불안의식 및 정신적 가치에 대한 향수는
보이는 세계보다는 관념적 환상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인상주의가 순간적인 외관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표현을 하였다면 이들은 보다
견고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며, 이로써 인상주의의 극복이라
는 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업적, 즉 순수한 빛과 색을 새롭게
발견하고 각자의 개성 있는 화풍을 인정하는 전통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상대적
으로 인상주의가 잃었던 견고함, 질서,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오한 깊이를 추구
하기 시작했다. 이들 세 화가의 접근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세 사람의
업적이 모두 20세기 미술-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이 발생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Self-Portrait with Palette, 1885-1887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은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의
부유한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은행가인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과
에 등록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1861년 파리로 이주했다. 세잔은 파리에서
인상주의 운동을 접했지만 과거의 회화에 대한 깊은 존경심 때문에 순수한 빛과
색채의 즐거움에 빠져들지 못했다. 초기의 넑고 순순한 붓질이 주는 생동감은
점차 절제되고 섬세한 붓질로 변했다. 몇 년의 훈련을 거치면서 세잔은 인상주의
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회화는 빛과 색채의 인상이 아니라 엄격하고 기하학적인
입체에 대한 이성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제는 가족 초상과 자화상,
정물, 프로방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과 같은 특정 장소의 풍경으로 제한했다.
성숙기에 그린 크고 넓게 펼쳐진 풍경화는 그가 세웠던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
리기'라는 계획의 의미를 전달해 준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두 가지 선택, 즉
과거의 미술을 형식적인 모델로 삼은 것과 자연광선의 사용은 입체감과 색채를
종합시키는 세잔의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면, 어느 화가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에 불과했을 것이다. 화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대중에게 외면
당했던 세잔은 죽은 후에야 20세기 미술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폴 세잔은 후기인상주의자들 가운데 형태와 구성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구축한
화가이다. 즉 인상주의의 회화를 이루고 있는 순간적 인상에 영원성을 지닌 견고
함을 첨가 시키므로써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그는 자연의 본질적 구조를 구현하는데 있어, 대상의 외형에서 잡아 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의 결과와 대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주관적 이해를 동시에 표현함으로
서, 20세기 추상미술이 가지고 있는 객관과 주관의 동시성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었다.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 1866

Lawyer(Uncle Dominique), 1866

Portrait of Achille Emperaire, 1867-68

이 인상적인 초상화는 세잔과 함께 엑상 프로방스의 쉬스 아틀리에서 그림을
그렸던 친구 아쉴 엥프레르를 그린 것이다. 큰 두상과 빈약한 다리, 의자에 앉아
있는 모델의 모습은 왠지 어색한데 엥프레르가 본래 난장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이프로 두텁게 발라 올린 물감, 화면 전반의 어두운 색조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기량을 쌓아가던 습작기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세잔은 이
그림에 마치 중세의 이콘화처럼, 모델의 이름을 작품 상단에 썼다.
1870년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Still Life with Green Pot and Pewter Jug, 1867-68

Young Girl at the Piano - Overture to Tannhauser, 1869-70

Pastorale(목가), 1870

세잔이 서른 한 살 되던 해 제작한 이 작품은 현실 너머의 남녀의 사랑을 환상적
으로 다룬 작품이다. 세잔은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 에로틱한 주제들을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도 성적인 환상을 담은 작품들 중의 한 점이다.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화폭에는 신비스러운 밤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섬인지,
강인지 모를 물가와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몇몇 남성과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누드로 그려진 여인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편으로 머리를 감으려
고 몸을 숙이고 있는 여인, 화면 왼쪽의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관능적
인 포즈를 취한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경에 한 여인이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워
있다. 이러한 여인들은 전형화된 포즈를 따른 전통적인 여성 누드의 도상들이다.
한편,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들 역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여성에 열중
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다양한 모습들이다. 특히 화면 중앙에 거만하게
턱을 괴고 누워있는 남자는 세잔 자신의 모습으로 이 환상을 객관적으로 관찰
하고 있다.

The House of Dr. Gachet in Auvers(오베르의 가셰 박사의 집), 1872-1873

이 작품은 1872년 세잔이 가족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에 체류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시기 세잔느의 작품은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Pontoise)에 살고 있던 피사로와 교분을 갖게 되면서, 점차 인상주의
화풍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 세잔느는 후경에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
위쪽에 위치해 있는 밝은 건축물, 즉 오베르의 그 유명한 가셰 박사의 집 서쪽 면
을 그렸다. 구불구불하게 시작되는 길, 일정한 구성으로 연속적인 시점을 형성해
주고는 있으나 그물망처럼 복잡하고 흐릿하게 얽힌 나뭇가지들, 특히 회색, 연한
갈색, 황토색, 갈색, 푸른색과 벽돌색 터치 등의 어두운 색조 등은 피사로의 영향
에서 벗어나 세잔느 고유의 양식을 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이 캔버스 표면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 세심히 그려진
반면, 이 작은 그림은 곳곳에 화폭의 우툴두툴함을 남겨둘 정도로 붓자국이 투박
하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세잔느 화업의 초기인 1872년에서
1873년 후반쯤으로 추정하게 한다.

The House of Pere Lacroix in Auvers, 1873

The Hanged Man's House, 1873

1872년 세잔은 부인 오르탕스 피케와 갓난 아들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 sur Oise)에 정착했다. 당시 피사로는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
(Pontoise)에 살고 있었는데, 세잔은 2년 동안 오베르에 머물며 피사로와 함께
작업을 하곤 하였다. 그 무렵 그려진 이 작품은 피사로로부터 받은 영향력으로
인상주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작품들의 특징인 화면 전체를 감도는 어두운 색조, 극단적인 대조, 에로틱
한 주제들은 밝은 풍경화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화폭에는 청명한 날씨, 밝은
햇살이 내리쬔다. 지붕에 흡수된 빛, 혹은 반사된 빛의 세밀한 감각들은 작은
붓질을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빛의 떨림은 대상 자체의 밝은 색조를 고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였던 일시적인 양상과 순간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화면에는 풍경의 기본적인 구조들이 조화와
리듬 속에 드러나고 있다. 탄탄한 구성, 지붕과 나무의 견고한 선과 면은 안정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세잔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사로
의 추천 덕분에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전에 참여하였다.
이 작품은 <오베르의 풍경>, <모던 올랭피아>와 함께 인상주의전에 출품되었고
도리아 백작(le Compte Doria)은 비평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구입하였다. 이후 빅토르 쇼케(Chocquet)가 이 작품을 다시 구입하여 1889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A Modern Olympia(현대적 올랭피아), 1873-1874

낭만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어두운 물감을 두텁게 발랐던 세잔느 초기의 작품들
은 들라크루아, 도미에, 쿠르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초기의 화풍은
1872년경 오베르 쉬르 오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1872∼1873년 그려진 이 작품은 세잔의 화풍 변화를 보여준다. 세잔은 이미
1866년 같은 주제로 그렸던 작품은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었던 데 반하여, 몇 년
뒤 다시 그려진 이 작품은 밝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밝은 화면, 선명한 색조, 형태
를 생략한 재빠른 붓터치는 이미 세잔의 화풍이 인상주의로 접어들었음을 보여
준다. 작품의 내용은 1865년 마네가 살롱에 큰 논쟁을 일으켰던 <올랭피아>를
언급하면서, 에로틱한 화가 자신의 환상을 담고 있다.
<올랭피아>의 검은 고양이는 이 작품에서 강아지의 모습으로 그려졌고, 본래
마네의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사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올랭피아를
올려다보고 있다. 세잔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 신사는 사창가를 찾은 손님
으로서 올랭피아가 창녀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베르에
머무는 동안 제작된 것으로 의사인 가셰 박사가 마네의 <올랭피아>를 칭찬하자
세잔은 단숨에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Study: Landscape at Auvers, 1873

Self-Portrait, 1873-1876

세잔은 입체주의의 선구자로서 미술사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는 생전에 비평가들의 냉담함과 대중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세잔느는 오랜 친구였던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L'oeuvre)』에서 자신을 실패한 천재로 묘사한 데 격분, 졸라와
절교를 선언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다. 여러 점의 자화상 속에서 세잔느
는 자신을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의 모습으로도, 단정한 파리 신사의 이미지로
도 그리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예의 무겁고 쏘아보는 듯한 시선을 관람객
을 향해 던지고 있다. 그의 굳은 표정을 통해 긍지에 차 있으면서도, 악의에 찬
비평을 두려워하는 화가 자신의 내면의 모순된 심리를 읽을 수 있다.
텁수룩한 수염과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 의상, 치켜 올라간
눈썹 등은 화가의 완고한 성품을 암시하는 듯하다.

Portrait of Chocquet, 1875

Temptation of St. Anthony, 1875

19세기 중반, 종교 예술의 부흥은 낭만주의의 영향이었다. 초기의 세잔 작품 역시
카라밧지오, 제리코, 도미에의 영향으로 낭만적이면서 바로크적인 성향을 갖는다.
특히 1862∼1869년에 세잔느는 엑상 프로방스의 그라네 미술관에서 카라밧지오
의 고전주의 성향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강간, 약탈, 살인, 난잡한 성적 타락과
같은 육체적 긴장이나 상상적 폭력을 주제로 한 환상적인 작품들을 주로 그린다.
세잔은 작품들을 거칠고 어두운 색채로 표현하였으며, 구성이나 붓의 사용에
있어서도 격렬하고 둔탁한 터치를 이용해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 연작과 유사한 구도로 나타나는 <성 앙투안느의 유혹>
은 중앙의 여인을 중심으로 세 명의 큐피트가 둘러싸 있고, 왼쪽에는 성자 앙투
안느와 악마가 자리잡고 있다. 격렬한 몸짓의 성자와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는
별개의 두 인물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전나의 여인은 물론이고 세 꼬마들마저도
배를 내민 자세는 오만 불손하게 느껴진다. 이집트에 은거해 있던 이 성자의
전설은 많은 화가들이 그렸고, 세잔도 세 점의 유채와 다섯 점의 수채를 남겼다.

Bathers at Rest (Les baigneurs au repos), 1875-1876

The Pool, 1876

Vase of Flowers, 1876

꽃이나 꽃병을 그린 세잔의 정물화는 무수히 많으나, 로코코풍의 것을 그린 그림
은 이것이 단 1점이다. 실은 이 작품은 제 2제정 시대의 판화를 그대로 유화로
옮긴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재료들을 보면서 그린 그림이 아니다. 판화를 사용
한다든지, 꽃을 조화(造化)로 바꾸어 그린다든지 하는 것은 세잔이 곧잘 하던
짓이었다. 색채를 자기 스스로 상상하여 만든 것이었으리라. 꽃병의 백색과 장식
부분의 투명한 청색계의 대조는 매우 투명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으며, 백색
꽃병에는 녹색의 반사색(反射色)을 쓰고 있다.
채광(採光)은 왼쪽 윗부분으로 잡고 있고, 꽃병은 오른쪽으로 조그맣게 그늘을
늘어뜨리고 있다. 꽃이나 잎, 꽃병은 붓자국이 매우 섬세하며, 그것에 비하여
배경이나 책상은 붓자국이 조금밖에 나타나 있지 않다.

Chocquet Seated, 1877

물체의 형태를 여러 가지 평면으로 분할하여 모자이크와 같은 선명한 색채 효과
를 노린 점이 이 초상화의 특색이다. 화면의 배경인 여러 점의 그림이나, 장식품
등으로 보아 이 작품은 숏케의 집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제작 연대는
1880년 전후로 보이나, 그 이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바닥과 벽이 만나는
수평선, 오른쪽 윗부분에 상하로 걸린 그림의 왼쪽 선이 의자의 선과 만나는
수직선, 이러한 두 개의 직선이 화면 구성상의 축을 이룬다.
그 외 여러 개의 직선들이 이것들과 평행하여 작은 악센트를 이루고 있다.
광선은 왼쪽에서 비쳐져 숏케의 얼굴이나, 상반신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으로 양분시키고 있다. 바닥이나 벽지의 붉은 무늬 등의 색채가 빛에 의하여 선명
하게 두드러지면서 빛과 실내 공기를 생성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Hortense Fiquet in a Striped Skirt, 1877-78

A Turn in the Road(꼬부랑 길)

1880년 전후에 세잔은 '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몇 점 제작하였으며, 그 중에서
도 이 작품이 가장 잘 완성된 작품이다. 대체로 퐁드와즈 근처의 풍경으로 보여
지며, 전경 중앙에서 중경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이 원운동(圓運動)
을 형성하여, 그 내부나 왼쪽의 가느다란 나무들이 화면에 틀을 이루고 있다.
배경의 경사진 지붕이나 작은 집들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고, 그 집들의
뒤에는 작은 언덕이 좌우로 있어 화면 구성상으로는 완벽 한 구도라 하겠다.
붓의 터치도 규칙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수년 후 제작된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의 완벽성 같은 것은 이 작품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장식적
이며 평면적인 인상이 짙다. 그러나, 고갱은 이 시기의 세잔의 풍경화나 정물화
에서 보여 주는 평면적인 성격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과일, 냅킨, 우유병이 있는 정물, 1880

폴 세잔은 1872년에서 1873년 사이에 피사로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나, 결코
인상주의 그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매우 독자적인 화가였던 그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소장된 미술만큼이나 견고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평생 사물의 외관에 치중하는 인상주의를 대신하여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본질, 그 원형을 찾고자 했다. 1878∼79년경 그는 물리적인
실체의 외관을 고수하는 한편, 공간 속에서 구현되는 대상의 조형적인 가치와
구조에 눈을 돌렸다. 목욕하는 이들, 남 프랑스의 시골 풍경, 정물화와 같은
특정한 모티브를 반복하여 그리면서 조형적인 실험을 지속하였다.

1880년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이미 세잔은 대상을 단순화시켜 추상적인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몇 개의 사과와 가정에서 익숙한 가재 도구들이 탁자에 놓여 있다.
사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대신에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를 구축함으로써
형태 내부에 있는 구조를 표현하였다. 삐딱하게 놓여진 칼이 공간의 깊이를 암시
하고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화면은 원근법의 전통적인 재현 방식을 전복
시켰다. 쌓아 올린 사과들과 탁자 모서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점은 하나가 아니라,
화면 밖으로 여러 개의 시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다초점에 따른 형태의
탐구는 이후 브라크와 피카소로 하여금 입체주의로 나아가게 하였다.

L'Estaque(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이유만의 광경), 1882-1885

이 풍경화는 세잔과 인상주의화파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리비에라 지역에서 고요하고 평범한 바다와 앞으로 높고 어울리지
않는 굴뚝이 펼쳐진 이 이름 모를 마을은 별로 매력적인 풍경이 아니다.
빛과 색채는 인상주의의 주요 주제였지만 세잔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Still Life, 1883-1887

Le vase bleu(The Blue Vase), 1885-87

세잔은 이 작품에서 활짝 핀 꽃의 형태 묘사보다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빛이 사물에 떨어지는 방식과 그에 따르는 색채의 변화라는 문제는
줄곧 세잔의 화두였다. 이 그림에서 공간은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면서 조밀하게
구축되었으며, 그 속에 위치한 정물들이 각각 균형 잡힌 부피감을 점하고 있으며,
꽃병은 화면 중심에서 정확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꽃병의 푸른색과 배경의 미묘한
푸른색의 조응은 캔버스 전체에 통일성,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이 작품이 그려지기
10년 전, 오베르 쉬르 오와즈에서 많은 꽃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모티프인 사과를 첨가하였다. 세잔은 꽃이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린다고
불평하며 한때 가셰 박사에게 꽃 그림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으나, 이 그림
에 그려진 꽃은 사과와 어우러져 화면에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그렇지만 그 작품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단순함과 절제가 르누아르의 꽃 그림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풍성함과 지나침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작품은 세잔이 죽기 2년 전, 1904년
살롱 도톤느의 일부로 개최되었던 세잔의 회고전에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였다.

Mont Sainte-Victoire(생트 빅투아르 산), 1885-1887

1880년대 이후로 줄곧 세잔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주제를 선택했다.
터너가 리기산을 그리고, 모네가 건초다미, 루앙 성당의 정면과 노르망디의 절벽을 그렸듯 세잔 역시 몇 가지 주제를 반복해 그렸다. 세잔의 작업실 창에서 바라본
생트 빅트아르 산의 육중하고 웅크리고 있는 듯한 윤곽선은 성숙기에서 후기까지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는 단일 주제에 집중해 마치 체스를 두는 사람처럼
인내심을 갖고 꼼꼼하게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아 분석적으로 접근해가는
세잔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은 세잔이 인상주의 화파에서
주장하는 실제 세계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점차 단념하고, 대상에 대한 신중한
분석을 선호하여 풍경이 화면 구성연습을 위한 소재로 변해가는 정도로까지 이어
갔음을 설명해준다. 그의 그림들은 인상주의라는 안전한 경로를 거부한 세잔의
끊임없는 불만족과 탐구의지를 전해준다. 형태들은 밝고 찬란한 대기의 빛 속에서
점차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변해간다.

이 작품은 셍트 빅투아르 산 주제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세잔이 스스로 세웠던 계획,
곧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리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빛으로 가득한 풍경을 향해 열려 있는 원거리 시점은 17세기의 위대한 회화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지만, 빛과 색채는 인상주의를 연상시킨다.

Still Life with Peaches and Pears, 1888-90

세잔은 광택 나는 도자기와 천, 손질되지 않은 나무와 과일 껍질 등의 표면 질감과
선원근법의 규칙을 무시하고, 과일과 물체를 균형 잡힌 기하학적인 입체로 묘사
했다. 이것이 입체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Vessels, Basket and Fruit(The Kitchen Table), 1888-90

세잔의 정물화 중에서도 복잡한 구성과 형태의 데포르 마숑 그리고, 시점의 이동이
란 점 등으로 보아서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탁자를 화면에 병치해 놓고 그 위에
과일이나, 갖가지 항아리들 그리고 과일 광주리, 냅킨 등을 풍성하게 배치하였다.
과일 광주리를 보는 시점과 왼쪽에 있는 항아리를 보는 시점의 차이는 이미 세잔
연구가들이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조형적 노력이 큐비즘의 이론 구성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배경의 구성도 매우 복잡하여 왼쪽에 짙은 갈색의
작은 테이블과 의자 등 벽구석까지 이르고 있다. 뒷벽 부분은 녹색·청색·보라색·
갈색 등 짙고 깊은 색들이 엉켜져 있고, 전경의 테이블과 평행하여 전경의
갖가지 빛깔들을 흡수하고 있다.

Madame Cezanne au fauteuil jaune, 1888-90

Boy in a Red Vest(Garcon au gilet rouge), 1888-1890

Boy in a Red Waistcoat, 1890-95

The Card Players, 1890-1892, The Louvre, Paris

세잔은 카드 놀이를 주제로 하여 1890년부터 1896년까지 5점의 작품을 완성
하였다. 5점의 작품들은 카드 놀이중인 사람들의 수도 작품마다 다르며 작품의
크기도 각각 달라, 세잔은 같은 주제로 일련의 조형 실험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반즈 재단(Foundation Barnes)에 소장되어 있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890-1892)에서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작품
에는 4명으로, 그리고 다시 루브르 미술관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는 2명
으로 줄었다.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이 그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으로, 구도에 대한 세잔의 집착을 잘 보여준다.
황토색 계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배경 속에 카드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두 인물
만이 부각되었다. 두 남자는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는 술병을 중심으로 거울에
비추인 듯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중앙으로 몰린 두 손과 카드들,
두 인물의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팔, 두 개의 모자 등 엄격한 대칭 구도는
작품에 고전주의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면 왼쪽의 인물이 좀 더 어둡게 칠해
졌지만 두 장의 흰 색 카드와 파이프, 흰 셔츠 깃 등으로 명암까지도 완벽한 균형
을 이루어낸다. 세잔이 임의로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구성과 균형을
위해 대상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했음을 알 수 있다.

Woman with Coffee Pot, 1890-95

학자들은 이 작품의 모델이 세잔의 부인인 오르탕스 피케, 혹은 자 드 부팡의
세잔의 저택의 하녀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작품이 누구의 초상인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마치 정물이나 기념비적인 동상처럼 굳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인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있어서 커피포트와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기하학적
인 형태는 대상의 객관성만을 보여줄 뿐, 모델의 성품, 내면의 심리는 전혀 개의
치 않는다. "자연을 원통과 원뿔, 원추로 보아야 한다"는 세잔의 유명한 주장은
이 그림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캔버스와 평행을 이루는
엄격한 정면성을 나타내고 문은 강조된 직각을 보여주는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
되었다. 여인의 견고한 두 팔은 커피포트처럼 원통으로 처리되었다.
세잔이 대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던 이러한 기하학적인 구조들은 색채
로 인하여 더욱 풍부해졌다. 세잔은 작은 색면을 조밀하게 겹쳐 형태를 만들고
입체감을 형성한다. 세잔의 작품에 나타난 공간 탐구, 대상의 기하학적인 관계에
대한 연구는 1908년 브라크의 첫 번째 입체주의 작품 <레스타크의 집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세잔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델 개인의 표현에 대한
고의적인 무관심은 큐비스트들의 추상회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The House with Cracked Walls, 1892-1894

Compotier, Pitcher, and Fruit(Nature morte), 1892-1894

Portrait of Gustave Geffroy, 1895

Seated Peasant, 1895-1900

Onions and Bottle, 1895-1900

세잔은 평생 정물화라는 매체를 통해 지속적인 조형실험을 완성시켰다.
그는 스페인과 네델란드의 대가들을 본받아 일상 생활의 친숙한 정물들이 이루어
내는 미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나 정작 세잔의 정물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
은 베르메르나 수르바랑, 고야와 같은 대가가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화가 샤르댕
이었다. 세잔은 1869년 루브르에 소장된 샤르댕의 그림들을 보았을 것이며
깊이 감탄하였음에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도 세잔은 샤르댕이 사용한 바 있는
화면에 대각선으로 놓인 나이프를 배치하여 화면에 깊이감을 주었다.
양파와 같이 구형으로 생긴 야채와 과일들은 그의 형태 탐구를 위한 가장 이상적
인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양파 이외에 다른 정물들, 유리잔과 술병
등은 여전히 오늘날 액상 프로방스의 세잔의 화실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같은 정물에 대한 화가의 지속적인 관심은 사물의 배치와 구성이 화가의 한결
같은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채꼴 모양의 탁자 가장자리에 늘어뜨려진
천은 세잔의 만년에 다른 많은 정물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모티프
이다. 이 늘어진 천은 술병이 유도하는 수직선을 상쇄시키는 수평선을 유도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질서 잡힌 화면 구성을 부드럽게 감추고 있다.
또한 탁자보는 술병이 그러하듯 텅 빈, 중성적인 배경에 상치되면서 갑작스럽게
화면에 쑥 뻗어 나와 화면에서 술병이 점하는 무게에 균형을 잡고 있다.

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the Bibemus Quarry, 1897

10여년 후(1897년경) 이미지는 더욱 단순해진다. 나무줄기와 풍경의 선들이
규칙적인 격자무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자연은 기하학의 엄격한 기준을
통해 관찰되고 있지만, 대기의 빛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여전하다.
이 그림은 강렬한 오렌지색의 채석장에서 빅트아르산을 바라본 대단히 빼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중앙의 커다란 바위덩어리에는 좌우에서 접근하는 틈사이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산은 실제보다 더 높게 그려져 있다.

Turning Road at Montgeroult, 1899

Apples and Oranges(Pommes et oranges), 1899

카몽드 콜렉션에서 인상파 미술관으로 오게 된 이 작품은 바로크적인 구도를
지닌 만년의 정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쿠션이 있는 긴 의자에 천을 늘어
뜨렸고, 몇 장의 냅킨을 깔아서 그 위에 도자기와 과일을 배치한 구도로서 물체
가 당장 굴러 떨어질 것만 같으나, 불안정감은 없으며 오히려 화면이 생동감을
보여 주고 있다. 물감은 매우 엷게 발라져 있고, 왼쪽 냅킨은 캔버스 천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터치는 매우 자유로우며, 도자기의 경우는 거의 터치를 발견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사과나 오렌지의 경우 붉은 색에서 노란색에 이르기
까지 그 변화가 매우 아름다우며, 형태나 양감이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원숙한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면 이러한 작품을 말할 것이다.

Still Life with Curtain and Flowered Pitcher, 1899

Large Bathers, 1899-1906, Philadelphia Museum of Art

만년의 7년간에 그린 이 작품은 이제까지 제작된 수많은 수욕도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출품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경,
중경, 원경 등 빈틈없는 논리적 화면 구성은 세잔이 점차적으로 가슴 속에 쌓아
왔던 고전적 정신의 결실이라 하겠다.

The Large Bathers, 1900-05,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Bathers, 1900-1906, National Gallery, London, Venturi 721

이 여성누드화는 오랜 미술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전통은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광경을 다룬 르네상스의 신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프랑스를 거쳐 앵그르와 마네로 이어진다. 세잔은 표현주의적
으로 윤곽선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입체주의에서 부피의 단순화까지도 예견하면
서 현대 회화사에서 전환기를 마련했다.

Young Italian Girl Resting on Her Elbow, 1900

Woman Seated in Blue, 1902-06

Mount Sainte-Victoire, 1904-1906

이 작품은 생트 비투아르 산 풍경에 대한 마지막 변주이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의 색조는 다소 어둡다. 산과 그 아래 시골풍경의 기하학적인 입체감은
크고 규칙적인 색의 파편들로 해체되어 있다.

Portrait of Vallier, 1906

Le Cabanon de Jourdan, 1906

1906년 10월, 세잔은 이미 이 작품에 손을 대고 있었다. 푸른색과 오렌지색의
명쾌한 대립으로 대충 그렸으며, 길이나 나무에는 붉은 색, 녹색의 보다 약한
대립도 주어졌다. 작은 집의 문과 허술한 부분에는 하늘 색과 같은 색으로
놓여져, 총합적 큐비즘에 있어서의 색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있으나, 세잔은
다시 그 위에 다른 빛깔들을 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면은 힘차고 명쾌함을 보여 주고, 제작도 반은 넘어서서 남은 작업은 세분의
처리나, 약간의 끝맺음 정도로 보여진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은 유화로서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10월 15일, 제작 도중 화가는 비를 맞고 인사 불성이 되었다.
수일 후 세잔은 약간의 회복을 보아 수채로 바리에의 초상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계속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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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1 야수파 죠르주 루오

   

   

The Art of Fauvism

Georges Rouault


★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

일꾼의 제자(자화상)

루오의 54세 때 작품이다. 자화상인데 명제를 <일꾼의 제자>라고 붙인 것을 보면
자기 작품에 대한 겸허한 심정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술가 이전에 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 싶다.
14세가 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전문으로 하는 스승을 찾아가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심정을 영원히 잊지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미 50 고개를 넘은 연령에도 불구하고 14세의 순진한 소년상 같은
느낌이다. 표면적인 묘사를 넘어 작가의 내면적인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그린다는 기술에 앞서 작가의 심적 충동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Self Portrait III, 1926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의 삶은 인류사에서 가장
척박한 시대인 폭력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1871년 5월 27일 파리 코뮌(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의 혼란 중 파리 교외지역 벨빌 지구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직공생활로 10대를 보냈다. 루오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검은색
테두리는 이 때의 영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1890년(20세), 국립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면서 정식 미술 학습을 받은 루오는 이 곳에서 훗날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상징주의 화가인 스승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만났다. 또한 앙리 마티스, A. 마르케 등 야수파 화가들과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흔히 야수파(Fauvisme)의 일원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는 당시 미술사조의 영향
과는 무관하게 작품활동을 지속했으며 서로 자유로이 자기의 재능을 계발해 나갔다.
자유로운 기질을 지닌 모로는 루오의 성향을 간파했고 자연 관찰과 진정한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립미술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루오가 아카데미파 화가들의
반대로 로마상 수상이 무산되자, 스승 모로는 제자 루오에게 학교를 떠나 반 아카데미
파 예술가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루오는 점차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면서
콩쿠르에서 요구하던 주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1898년 정신적 지주였던 스승 귀스타브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루오는 정신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루오는 자연 속에서 휴식하며 안정을
취했다. 파리에 돌아온 후 가톨릭 지식인인 레옹 블로와(Leon Bloy)
책에 푹 빠졌는데 특히 레옹 블로와의 정신적 독립성과 직설적 스타일에 매료되어,
모순되고 천박한 현실을 고발한 레옹 블로와의 사회관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도 새로운 예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의 눈에는 현실이 추악했고
이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됐다. 가면을 벗고 화려한 치장을 벗은 진실한 인간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이 때부터 진지하게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초 루오는
데생과 색채의 격렬함, 역동적인 선, 날카로우면서 강렬한 붓 터치가 특징인 자신
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서커스단
의 광대나 판사, 부랑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숨겨진 면모를 예리하게 파헤쳤을
뿐 아니라, 창녀와 판사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형상으로 그려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다. 당시 사람들은 등장인물의 형상을 왜곡시켜서 강렬하게 표현한 루오
작품의 난폭함에 충격을 받았다. 이 때부터 루오는 재료를 중시해, 1910년경에는
풍부한 채색이 가능한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유화의 비중이 점점 커진다.
루오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테크닉을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1917년, 파리의 유명한 미술상인 앙브로와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가 루오에게 그의 작품들 전체(770점)를 사겠다는 제안을 한다.
루오는 자신의 작업 리듬에 맞게 작업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승낙
한다. 이후 10년 동안 루오는 볼라르가 요청한 판화작업에 열중했다. 볼라르는
<위비 영감의 재림>, <회상록>, <유성 서커스단>, <수난>, <미제레레>,
<악의 꽃> 등 수많은 저서의 삽화 제작을 주문한다. 이제 제작된 판화는 루오의
작품에서는 물론 그의 회화 작업 전개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917년에서 1926년까지 10년 동안 루오는 판화작업에 열중하여, 회화 작품은
많이 그리지 못했다. 이때 제작된 100여 점은 서커스 단원들, 종교적 주제, 풍경
으로 이 시기는 역동적 선과 통일성과 단순성이 특징이다.
표현적이면서 장식적인 검은색 외곽선들은 형태의 구조를 이루어 주며 비중 있는
밀도와 움직임을 표출하며 운동감과 깊이를 준다. 판화 기법으로 끊임없이 작업
하고 단계를 밟아가던 그는 작품을 완성의 경지까지 천천히 이끌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아틀리에에서 선과 형태와 색채에 대한 실험에 몰두하여 많은
중요한 작품을 완성시켰다. 1930년대에는 평온하면서도 활기찬 색조로 가득 찬
기품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꽃, 풍경, 누드 등 자연의 아름
다움을 찬미하는 주제를 즐겨 그렸다. 종교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의 얼굴, 수난도,
성서의 풍경화가 점점 많아진다. 1945년에서 47년경에는 더 밝고 빛나는 색조로
발전한다. 재료는 두꺼워지고, 붓질은 화면위에 불규칙하게 쌓여지면서 표현 기법
에 따라 색 반죽이 형태를 잡아간다. 1940년에서 48년 사이에, 물감이 훨씬 더
두껍고 풍부해져서 작품이 실제와 같은 기복을 지니게 된다. 루오는 판화를 통해
데생과 형태를 단순화했는데, 1940년경에는 형태들이 기호나 상징적인 기하학적
구조가 되어버린다. 루오는 구상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않지만 자주 추상의 세계로
접근하곤 했다.

화가 루오의 인생에서 마지막 십년(1948~1958)은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재료에
대한 심취로 특징지어 진다. 이 최후의 시기는 그의 작품이 가장 빛을 발하고 완성
의 경지에 이른 시기다. 그림에 덜 희석된 물감이 몇 센티의 두께로 곳곳에 쌓여
있다. 폭 넓은 검은 외곽선이 기복 효과를 강화 시켜 준다.
오랜 동안 고집스럽게 색을 반죽하고, 주물러서 그 특성이 변화될 정도이다.
'사라(Sarah)'의 얼굴은 이 시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색채의 뉘앙스와 빛의 효과를
늘려가며 물감을 중첩시키는 방식은 그림에 조각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색채와 밀도있는 화면을 통해 그의 작품이 경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회화의 재료에 대한 고집스런 탐구 작업은 루오의 특징이다. 그는 연금술사처럼
비밀에 싸인 채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들을 변형시키고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하면
서 실험과 연구를 계속해 나간다. 회화 기법에 대한 탐구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열된 감수성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은 루오의 작품에 생명과 호흡을 불어넣는다.
그에게 예술은 데생과 색채와 질감을 통한 소통의 수단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종이나 화폭에 내려놓는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무엇보다도
뜨거운 자기고백이다. 루오의 예술은 단순한 조형적 실현을 뛰어넘는 한 인간의
사회 참여이기도 하다.

1939년 7월 볼라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볼라르의 후손들과 루오는
계약에 포함되어 있던 미완성 작품의 소유권을 두고 소송을 벌인다.
루오는 승소했고 작품을 받았지만 전작품을 소각시켰다. 작품을 완성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완성된 작품은 자신의 양심과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신념
에서다. 루오의 삶과 작품은 타협하지 않는 예술정신의 정수로 요약된다.
흔히 루오에게는 '20세기 마지막 종교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말년에 이르러 심오한 종교적 성찰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의를 갈망한
한 예술가는 종교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종교 자체를 주제로 하지 않았다.
루오가 그림의 영감을 얻은 곳은 현실세계가 아닌 숭고한 영적세계에서였기 때문
이다. 현실과 숭고한 영적 세계를 넘나들었던 루오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위비 영감의 재림:Reincarnauions du Perer Ubu>, 1928*

위비 영감의 재림은 화상 볼라르가 극작가 알프레드 자리의 희곡 '위비왕'에 자극을
받아서 쓴 여러가지 글들을 함께 펴낸 것이다. 1917년 볼라르는 루오에게 이 책
의 삽화를 부탁했고 그 조건으로 판화집 <미제레레>의 출품을 승낙했다.
이 글들은 선생이나 부자들의 용렬함이 냉소적으로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루오는 이 주제를 두 가지 테마로 표현하였는데 하나는 혹사 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선량한 흑인가족이며 다른 한쪽은 부와 권력을 움켜진 악독한 폭군 위비
영감의 모습이다. 앙브로와즈 볼라르는 1932년에 이 책을 출판하였다.

*<회상록:Souvenirs Intimes>, 1926*

루오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문학가나 화가에 대해서 쓴 회상과 함께
그들의 초상을 실은 판화집이다. 서문은 앙드레 수아레스(Andre Suares)가
썼으며, 1926년에 출판되었다. 구스타브 모로, 레옹 블로와, 보들레르, 세잔,
르누아르, 도미에 등의 초상이 실려있다.

*<서커스:Cirque>, 1930*

서커스는 출판 예정이었으나 출판되지 않았던 판화 시리즈이다.
서커스라는 테마는 루오가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그려왔던 주제였다.
달리는 말의 등에서 재주를 넘는 여자 곡예사, 줄을 타는 무용수, 광대 등, 불안정
한 자세에서 균형과 안정을 찾으려는 서커스단 사람들은 루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본문은 1926년 시인이며 평론가인 앙드레 수아레스가 썼으며 발간은
원래 1931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현재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유성 서커스단:Cirque de l'Etoile Filante>, 1935*

17점의 다색 판화로 이루어진 <유성 서커스단>은 본문은 루오가 쓰고 목판위에
루오가 그린 그림을 조르주 오베르가 새겼다. 그리스도를 그린 옆에 무희와 어릿
광대, 창녀의 초상을 함께 그렸다. 이 모두의 공통적인 요소는 뚜렷한 윤곽선과
활기찬 자세와 생명력이다. 이는 강렬한 야수파적인 색채가 다소 밝은 부드러운
색채로 바뀌었으며 때로는 순수한 톤으로 바뀌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화려한 존재들과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매우 슬픈
삶 사이의 극단적인 대비를 서커스의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루오는
말했다. 그리스도와 같은 고귀한 인물들의 이미지는 그릴 때처럼 삶에 내재한
비참함을 포착하기 위해서도 그의 현대적인 감수성을 이용했다.
'유성'이란 뜻은 출판사 이름이다.

*<수난:Passion>, 1935*

루오의 그림과 수아레스의 글을 합작하여 출판하려는 시도는 <서커스>, <미제
레레>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수난>은 수아레스의 본문과 루오의 색채
동판화 17점, 목판화 82점으로 제작되어 1939년 출판되었다. 볼라르는 이
책의 출간 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마지막 출판물이 되었다.

*<악의 꽃:Les Fleurs de mal>, 1938*

악의 꽃은 시인 보들레르의 시집으로 루오에게는 이 시집을 테마로 한 판화집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볼라르의 요청으로 제작된 동판화집이며, 또 하나는
색채 동판화 시리즈인데 1936년부터 38년에 걸쳐 제작된 30여점 중 완성된
12점이다.(이번 전시된 작품은 색채 동판화)

거울 앞의 娼婦

루오는 1902년 이후 무서운 정열로 일련의 창부들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많은 나체의 창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들의 고달픈 삶의 탓일까? 모두가 노기(怒氣)가 서린 표정들이다.
이 작품 역시 냉정한 입장에서의 사회 관찰이나 비판성은 전연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노기에 찬 격렬한 고발심과 격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단숨에 그린 수채화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드가나 로트렉도 나부를
많이 그렸지만 화면에서 풍기는 냄새가 이질적으로, 루오 특유의 세계가 잘 나타
나 있다.

겨울(풍경)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수년 전부터 루오는 많은 풍경화를 수채로 그렸는데,
그 대부분은 20×30cm의 소품들이다. 경사진 언덕과 도로, 수직(垂直)으로 된
나무들, 지극히 의도적인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린 이와 같은 구성적
의식은 후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인생의 고난과 사랑이 그림 속에서
숨쉬는 것 같고, 그리스도가 금방 그 옆에 와 있는 듯한 절박감을 갖게 한다.
깊은 인간애가 루오의 그림 속에 서식해 있고, 이 인간애는 철학적 차원을 넘어선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되고 있다.

풍경

루오는 1911년에 지금까지 살았던 정든 곳을 떠나 교외로 이사한다.
이 시기를 고비로 여러 장의 전원풍경(田園風景)을 남겨 놓았다. 공원 또는 한적한
농촌의 풍경을 그렸는데 필치는 무척 경쾌하다. 대개의 경우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자연 속의 점경인물(點景人物)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이며 세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기할 것은 루오 특유의 암색조(暗色調)에서 밝은 화면으로 변한 점이다.

우울한 광대(道化師), 1902-03

루오가 소년 시절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작품에서는
그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검고 굵은 선, 많든 적든 간에 단순화된 색조
처리, 투명한 색감 등이 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얼굴 부분의 광채는 비현실적일
정도이다. 루오는 도화사(道化師)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조명을
받은 듯이 보이는 안면 처리, 크게 뜨고 있는 눈, 모두가 너무도 강렬하다.
그리고 상의에 붙어 있는 백색의 리본과 이에 어울리는 색채적 효과는 이 화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교외의 그리스도

그의 작품이 창작되는 순간, 그것은 항상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작가의 온갖 노력 끝에 생산되는 것으로, 그가 항상 그와
같은 긴장의 연속 속에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까닭이다. 이 풍경에서
느끼는 것은 세속적인 소요나 허식이 없다는 것이다. 쓸쓸한 표정을 지닌 집이
몇 채 있을 뿐, 아득히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길 저편에는 달이 외롭게 떠 있으며,
길은 그 반사를 받아 환히 비치고 있다. 이것은 도화사들이 그들의 생활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의 고요일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 도화사들
옆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

道化師: 빨간 코

관객들 앞에 나와서 웃음을 팔던 도화사들이 이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된다.
주로 수채를 써서 그린 제 1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노동을
강요당하던 비애와 슬픔에 얽힌 군상들이다. 그러다가 제 2기에 들어서면서
내면적인 변화가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가
아닌 유채화이다. 뿐만이 아니라 관중 앞에 나온 도화사도 아니다.
그의 억세고도 굵은 상과 그리고 강렬한 색채 및 표정 등은 전자보다 더욱 작가의
내면적인 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피에로

루오가 그린 피에로 작품 가운데에서도 온화한 표정의 그림이다.
어둡게 처리된 배경으로 안면이 부각되어 있다. 중후감이 넘쳐 흐르는 표정은
필경 루오 자신의 모습이리라. 언뜻 보아 무표정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를 보여 주는데 인간의 신비감마저 감도는 듯 하다. 이와 비등한 구성은
만년까지 계속되는데 전체적인 색감, 공간의 처리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성탄절의 풍경

달은 안 보이지만 야경이 틀림없다. 민가의 지붕에는 잔설(殘雪)이 희게 비치고
있으며, 보고 있노라면 왜 그런지 쓸쓸한 적막감이 찾아온다. 인물은 안 보인다.
이 화면에서 인물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도화사가
연상되며, 일종의 공통된 세계를 보여 주는 것 같다. 한편 지평선 저쪽으로는
청색이 보이며, 밤 하늘에 무한히 뻗어가는 인상을 더해주고 있다.

상처를 입은 道化師

루오의 예술은 강렬하면서도 구수한 민화적(民話的)인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상징적이면서도 설화적(說話的)인 내용이다. 그 설화 속에는 달, 구름, 도화사의
의상과 표정들이 보면 볼수록 끝이 없이 인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싶다.
앞의 두 사람은 기운없이 눈을 아래로 뜨고 있으며, 키가 작은 뒷사람은 앞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다. 상단 부분에 안면을 내보이는 인물은 누굴까?
분명 도화사는 아니다. 고달픈 인생항로(人生航路)를 말하는 듯 설화성이 있으면
서도 전체가 풍기는 상징적인 효과는 또다른 별개의 예술성을 말하는 듯 하다.

법정에 나온 그리스도

맑은 표정을 가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의연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남녀 각각 상기된 표정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윤곽이 다르고 인상이 다르다. 그들은 천사의 얼굴도 아니요,
사도의 얼굴도 아니다. 피고와 증인 같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상이
험상궂게 보인다. 얼굴은 모두가 열 여섯이나 되는데, 세 사람을 빼면 열 세 사람
이 남는다. 필경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태인을 그린 것일까? 혹은 빌라도 법정에
선 그리스도를 조소하는 대사제(大司祭)나 군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의 얼굴

루오의 그리스도는 전능하고 영광에 찬 그리스도 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가련한 도화사, 재판 받는 피고나 가난한 사람들과 도피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려는 고난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 상이다. 루오는 안면을 아래
로 숙인 그리스도 상을 무수히 그리고 있다. 배경이 되는 넓은 공간 속에 유독
붉은 구름이 광채를 보이고 있다. 화면 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구름은
화면에서의 상징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푸른 새

전쟁 중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은 여배우 마리아 라니가 모델이 되었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자세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이 미녀는 루오 자신이
화면 윗부분에 표기해 둔 바와 같이 '푸른 새'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화면을
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새에게 노래를 시키려면 눈을 멀게 하라'는 습관이
있다. 그와 같은 속세적인 것에서 취재, 비록 새를 상징한 얼굴을 그렸지만
루오는 이를 자신의 예술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루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그의 인간상을 주제에 용해시켜 더 멀리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소가족

대작을 별로 안 그린 루오에게는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작이다.
높이만 2m가 넘는다. 원래 이것은 규도리 부인에게서 의뢰받은 다피스리를
위한 그림이다. 매우 감동적인 표현이다. 상처 입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을 두고
서로가 위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생활의 고통을 나누려는 표정은 무한한
인간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 아니 보다 더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필경 루오는 이와 같은 슬픈 사연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궁극적
으로는 그것에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과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루오의 또 다른 대작은 1931~32년에 그려진 <무희>(216cm X 116.5cm)다.

저녁놀

루오는 1937년부터 39년까지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1920년경에 그린 <교외
의 그리스도>, <성탄절 풍경> 등에 비하면 화면(색조)이 맑아졌다.
이미 그의 풍경화는 시각의 자연에서 심각(心覺)의 자연으로 변해 온 것이다.
구도나 여기 등장되는 건물, 인물들은 물론이지만 광선 처리나 화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종교인으로서의 심각적 감정에서 솟아난 새로운 차원의 세계이다.
그리스도와 2, 3명의 인물들이 노상에 서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필치, 굵은 선,
충만된 구성 등 실로 놀라운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녹색조(綠色調)의 하늘 처리 등은 격조 높은 그의 품위를 말해 주는 듯하다.

저녁놀 2, 1952

聖顔(성안), 1929-1939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여성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상이 찍혀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면
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聖顔(성안)이라고
한다.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일본 도쿄의
요시 재단에 소장되어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이다. 많은 화가들이 예수의 모습
을 그렸으나,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루오의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인내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본질
에 관해서는 중세 이래 많은 신학자들이 논해 왔다. 루오는 화가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으로 성안을 그린 것이다.

聖骸布(성해포)

흑색을 주조색으로 굵은 필치, 대담한 색조 등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것은 수난의 성안(聖顔)을 그린 것으로 어느 친절한 사람(唐墨-당묵-을 선사
해 준 분)에게 사례로 건네준 작품이다. 단조롭게 처리된 이 작품은 내용에서
부터 풍기는 광채가 형용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신비로운 경지, 동양적
인 정감, 여기에 루오의 회화성이 있으며 그 마력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1954

The Old King, 1937

노왕(老王)의 표정은 몹시 침통하다. 이 작품에서는 왕의 권위나 위신 등은 찾아
볼 수 없다. 왕관 그리고 화려한 의상에서도 그와 같은 허영심은 없다.
마치 <수난의 그리스도> 나 <상처입은 도화사> 상과 일맥 상통하는 인간상이다.
신비롭게 가라앉은 화면 처리는 마치 중세 시대의 '글라스 회화'를 연상시켜 준다.
싸인이 없는 것을 보면 다시 가필하려는 작가의 고원(高遠)한 인간상을 물씬
느끼게 된다. 한편 이 작품은 루오 인간상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작가의 정신 내부를
잘 표현한 걸작이다.

受難(수난)에서(모든 이의 惡의 지식)

유리와 같은 투명한 배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나상은 대화하는 형태로서
중후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화면이 양분되기 쉬운 위태로움을 안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가 다리를 벌려 그 위태로움을 덜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반신
이 상반신에 비교해서 짧게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있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의 바깥쪽 다리가 상반신을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일까? 색채도 대조적인 색을 사용했음에도 품위가 한층 높아 보인다.
중량감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受難(수난)에서(같은 밤 함께 죽어)

그리스도 좌우로 두 사람이 그려졌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도적들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부터는 은은하게 광선이 흐르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골고다 언덕(화면 좌측) 아래로부터는 달이 떠오르고 있다.
은은한 광선은 하반신을 비추고 있다. 화면 구석구석에까지 드라마틱한 처리를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화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마치 액자의
테두리) 부분의 수법은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는 데 효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루오의 심원한 회화성이 있다.

受難(수난)에서(무게도 부피도 없이 그는 나간다)

루오의 작품은 섬세한 묘사가 있다. 그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를 그리기 위함
이리라. 초기에 그는 모로의 교실에서 배웠으며 모로는 물론 렘브란트의 영향
까지 받았었다. 그래서 그의 24세 때의 작품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녀
들> 등을 보게 되면 무서운 묘사력을 지녔던 루오이다. 루오는 단연 그 묘사에서
벗어나 대담한 필치와 색면(色面) 처리들을 자유롭게 표출하는데 이는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受難(수난)에서(두 궁전에 연한 이 인기(人氣)없는 길)

환상적인 수아레스의 문장에 맞추어 제작된 시리즈의 한 장면이다.
희게 입고 오른쪽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그리스도로, 왼쪽 건물 끝에 우뚝 서
있는 망루대 같은 수직으로 된 건물 부분과 조화를 이루면서 어울린다.
그 위 하늘에는 역시 달이 떠 있다. 테두리를 그려 넣은 것도 특수한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중앙의 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평선 너머로
우리를 유린해 가는 듯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기만 하다. 우리의 심층 한 부분에
있는 고독감을 루오는 자신의 예술 세계로 승화시킨 것이다.

受難(수난)에서(풀에 샘물이 속삭이듯)

조부모도 양친도 모두가 독실한 카톨릭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이었다.
루오의 그와 같은 가정 화경과 거기에다 예술적인 충동이 섞여, 그가 그리는
그리스도는 그의 인간 내부의 전부가 성화(聖畵)의 내용과 일치되면서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를 앞에 앉히고 영적대화(靈的對話)가 오가는
것이다. 달이 어김없이 닮은 마리아 상 위(위쪽 상단)에 떠 있으며 좌우의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다. 루오의 작품 앞에서는 그저 머리가 숙여진다.

受難(수난)에서(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화면에 골고다 언덕은 가운데, 그리고 좌우로 십자가가 그려 있을 뿐 언뜻 보아
적적하고 음산하고 무섭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서 치솟아 있을 뿐, 모든 지상
의 역사가 이미 종말을 고하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그리스도 안에 모여, 1945

受難(수난)에서(너희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아느냐?)

앙드레 수아레스의 종교 시집 '수난'(1939년)의 삽화 12매 가운데 10매를 뽑아
동판화를 새로이 유화로 제작한 것이다. 슬픈 사연에 잠긴 여인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박진감에 넘쳐 흐른다. 멀리 달이 떠 있으며 엄숙한 분위기
표현에 성공한 작품이다. 루오의 작품이 모두 그러하듯이 단조롭게 보이지만,
내용에서 풍겨 나오는 이야기는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쟉 보노무

쟉 보노무는 농민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이다. 백의와 푸른 하의, 그리고 붉은 띠를
두른 이 사나이는 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상반신을 약간 숙인 채로 달이
떠 있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 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상(像)을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고독감이다. 멀리 지평선 위로 외딴 집
이 한 채 서 있다. 집의 흰 벽면은 인물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붉은 띠와
지붕이 또한 색채적인 조화를 형성하면서 한층 화면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피난

루오가 처음부터 시도한 시리즈 <피난>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그림이다.
루오는 그의 '독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피난하는 사람들, 그 모습들은 우리 세대의 모든 사람들의 상(像)이다.
사람들은 병마와 권태와 빈곤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리고, 겨우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재난이 닥쳐오며 급기야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아무 의욕이나 희망을 갖지 않은 피난자들은 얼굴을 숙이고 힘없이
걸어야 한다. 뒤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이,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행복
따위는 잊은 채 거닐고 있다." 저녁놀은 어느덧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희망의 별은 까마득하다.

그리스도교적 夜景

루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가장 우주적인 작품으로 보여진다.
구도는 아래 부분에서 윗부분으로 장대하게 울려 퍼졌고, 수 개의 원(圓)과 반원
(半圓)의 포름이 화면 중심부에 위치해 루오 특유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내면 세계를 표출 시키는 그의 회화 언어가 그러하듯 이 그림에 등장한 배, 바다,
달, 섬, 집, 수목 등은 달빛을 받은 달밤의 자연 현상을 시각 체험대로 재현시킨
것이 아니고, 그 실체를 보는 루오의 내면적인 세계, 즉 심각적(心覺的) 진실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티베리야스 호(湖)에서의 그리스도와
제자(그림 아래 부분)가 모티브인데, 신비스러운 빛과 검은 그림자 및 무한히
크고 넓은 화면이 어떤 영겁의 세계, 영원한 정신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우리들의 쟌느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나치스 군대가 프랑스로 진주(進駐)했었다.
남달리 프랑스를 사랑하던 루오의 심정은 국민들의 추앙받는 성녀(聖女) 쟌
다르크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작품을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조국의 영웅이라기 보다 수난받는 인간상으로 그렸다. 배경은 이 시기에 꾸준히
그린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풍경화와 같다. 주인공은 숨김 없이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조국애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작가란 때로는 그 시대의
증인이며 대변자가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 아름다운
조국애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리라.

풍경(세 사람이 있는)

루오는 만년에 이르자 화포에 바른 유채 물감을 나이프로 깎아 내고 다시 바르는
기법을 버린다. 따라서 화면은 울룩불룩하고 터치 자국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다.
중기 작품의 특색인 문지른 듯한 색의 투명감은 없어지고 '용암(熔岩)과 같은
중후한 색채 덩어리(P. 크르테온)'가 조형의 수단으로 화한다.
색채는 선명하고 밝으며 따라서 건강하다. 이와 같은 분명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조형 의지는 그의 기나긴 고난 끝에 얻어낸 예술 경지와 독실한 신앙심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세 인물을 그림 전면에
배치하고 파뿌리 모양의 성당을 그림 원경 중앙에 앉혀 하늘 나라와 인간 사회를
상징적으로 대조,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게 했다. 루오는 이 해에 볼라르 가(家)와
의 소송으로 되찾은 그림 가운데 315점을 불태웠다.

트리오, 1943

피에로의 얼굴에 찍힌 점 하나.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감추고 찍은 바보 같은 점에서 성자의 모습이 아스라히 잡힌다.
이 작품은 3명의 삐에로를 그린 것이지만 종교화적인 엄숙함을 지니고 있다.
루오에게 있어서 삐에로와 곡예사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루오는 그들을 인간사를 벗어난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수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고 보았다. 창부의 모습이 개성을 담은 개인이라기보다는
영혼까지 파멸되어 가는 인간사의 대표로 그려졌다면 그와는 반대로 삐에로는
옷을 통해 그 직업을 확실히 추측할 수 있기는 하지만, 루오의 그림 속에서는
대체로 삐에로의 묘기나 역할, 그리고 소도구 등은 가능한 배제되고, 인간적인
갈등이나 슬픔 고민을 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며, 그것마저도
초월한 성자로서의 모습까지도 느껴지게 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삐에로는 형형한 눈으로 세상과 삶을 응시하여 그 허무는 직관하고 통찰하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

푸른색 배경의 삐에로들, 1943

루오는 소외되고 잊혀진 변두리 인생들 중에서도 삐에로의 곡예사들의 모습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끝없는 동정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푸른색 배경위에 등장하고 있는 두 인물은 삐에로들로 이들은 항상
타인의 웃음을 사기 위해 몸을 우스꽝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 속의 두 삐에로는 고요한 푸른색 배경에 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푸른 색은 전통적인 서양 종교화에서 정신성과 초월성을 상징하며, 루오는
전통적인 색의 상징성을 이어받아 푸른색을 정신적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다.
푸른 배경 속에 놓여진 고요한 두 명의 삐에로는 낮고 천한 일을 고단하게 수행
하는 가운데서도 정신적 고귀함을 잃지 않는 듯이 보이며, 이것이 바로 루오가
세상을 살면서 얻고자하는, 그림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가치이다.

베로니카, 1945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카는 예수께서 갈바리아 산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흘러 내리는 피땀을 닦아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성면을 씻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에 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카로 알려졌는데, "베로"는 라틴
어로 "베라(참, 진실한)"이고, "이카"는 "참모습"이란 뜻이 된다.
루오의 베로니카는 단순한 선표와 면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초상화이지만, 이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여인의 얼굴은 초월성과 지상의 아름다움, 종교적 엄숙함과
여인의 따스함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가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자의 고독함을 표현하고 있다면, 그의 베로니카는 세상을
향한 넓은 자비와 따사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지개 곡마단의 소녀 마술사, 1948-49

곡마단의 소녀 마술사는 옅은 미소를 띄고 관객을 바라본다.
전체적인 화려한 색감은 소녀 마술사가 펼치는 루오의 종교적 인물들에서 보여
지는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통적인 종교화에서 아치형의 건축
구조물 안에 있는 예수나 마리아, 성인 등의 인물이 등장하는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으로 인해, 이 소녀의 복장이 아니라면 마술사가 아닌 종교적 인물로
생각될 정도이다. 루오가 그려내는 현실을 살면서 현실을 초월하는 인물들은
루오가 표현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아가 바로 이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수난), 1953-56

루오는 "보는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될 만큼 감동적인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예수의 얼굴은 극도로 간단한 선묘로 이루어져 있지만,
조용히 감긴 눈과 긴 코, 그리고 의지로 다물어져 있는 입매만으로도 극한의
초월성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구도의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알굴 뿐 아니라,
가난한 삶 속에서 고귀함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물들의 얼굴
에도 적용되어 있다. 루오가 그려내는 인간의 고귀함은 고통 한가운데서 그
고통을 감내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고귀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사라, 1956

루오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반죽처럼 걸쭉한 물감이 두꺼운 층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색채의 뉘앙스와 빛의 효과를 늘려가며 실험하던 말년의
제작기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림 속 얼굴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그림에 조각적
인 느낌을 가져다 준다.

"As proud as if she were still alive of hier noble descent", 1937

Tete d'une jeune fille, 1939

Couverture II pour Verve 4, 1938

Madame Carmencita

Le Christ et Mammon

Clown et Enfant(서커스), 1930

Ballerine(서커스), 1932

Enfant de la Balle(유성 서커스단), 1935

Parade(유성 서커스단), 1934

"Ecce homo"

Fille de Cirque

Christ in the Neighborhood, 1935

Christ among the poor, 1935

Automne(가을), 1938

Christ on the Cross, 1938

Seated nude, 1938

The Conversation, 1938

Dr. Paille and Prof. Poutre, 1938

The flying fish, 1928

Les Visages

루오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화집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A. 수아레스의 성시(聖詩)를 근거로 그린 <미제레레Miserere:
비애>
연작(連作)을 탄생시킨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인간 군상들이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총을 갈구하며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으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육체적 결함과 고통이 정신적 가치와 위상에는 손상을 주지 않음은 물론
이고 오히려 그것이 더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견고하게 함을 일깨워 준다.
수아레스는 "예술가란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만들어 고통 받는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둘은 서로 잘 통했으리라.
가장 높은 단계의 영성은 가장 밑바닥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그의 예술철학
이 바로 그의 독창적 예술을 낳았고 그만의 개성과 천재성을 구축하는 토양이
되었다. 그의 종교화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난 세속적 종교화다.
그래서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외면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제레레'라는 명칭은 4세기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 성경'의 시편 50편 구절인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기원한다. 루오는 이 판화집의 본문을 따로 만들지 않고 직접 지은 시구나 성서
구절에서 뽑아 제목만 붙였다. 미제레레 연작은 첫 구상에서 출판까지 27년이
걸릴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처음 구상은 <미제레레와 전쟁>이라는 제목에
50점으로 구성된 동판화 작품집으로 루오는 100점이 넘는 밑그림을 바탕으로
1921년부터 동판화 제작을 시작해 1926년 58점을 최종 완성했다.
1927년 58점의 동판화가 인쇄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과 출판업자의 갑작스런
사고사(1939년)에다 미완성 작품에 대한 소유권 소송이 겹치며 출판이 지연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48년 파리의 한 출판사에서 <미제레레> 판화집이 간행
되며 세기의 명작은 빛을 보게 되었다.
<미제레레> 연작은 루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깊은 애정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2번의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
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깊은 울림
을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추상의 세계로 도피할 때도
그는 현실세계 속 인간으로 이어진 끈을 놓지 않았고, 후세에 '정의로운 화가'로
기억될 수 있었다.(이번 전시에는 작품 58점 모두 전시되고 있다.)

Miserere, 1923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Les ruines elle-meme onto peri, 1926

폐허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Are we not all convicts?, 1926

우리 모두 죄인이 아닙니까?

Solitaire, en cette vie d'embuches et de malices, 1922

The condemned man was led away, 1922
유죄선고를 받은 자는 떠나버리고...

En tant d'ordres divers, le beau metier d'ensemencer une terre hostile/
In so many different domains, the noble task of sowing in a hostile land, 1922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것.

Homo homini lupus, 1926

Squelette, 1927

De profundis/From depths of soul, I cry to you, O Lord,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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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20 신고전주의:제라르, 장 그로, 폴 푸르동

   

   

   



제라르(Baron Francois Gerard: 1770~1837)


제라르는 다비드의 제자이며, 다비드를 본받아 많은 역사화와 신화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 1796 "Jean-Baptiste Isabey and his
Daughter, 1795"
작품으로 살롱에 출품해 인정을 받았으며, 시대의
뛰어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Jean-Baptiste Isabey and his Daughter,1795 *

*프쉬케와 에로스, 1798*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쉬케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소녀로
사랑의 에로스는 프쉬케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작품은 1798 관전에 출품되었으나 평이 좋지 않았다.
그의 기법이나 표현이 차갑고 인물은 도자기와 같은 무기력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이유였다.  여기에서 그는 실망하고 초상화 제작
으로 전환하였다.  그후 그는 1제정과 왕정 복고시대를 거치는 동안
공식 초상화가로서 유명해졌다.

*Portrait of Catherine Worlée, Princesse de Talleyrand-Périgord, 1804-05*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1805*

1800 다비드가 그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화의 인물과 동일인이다.  
작품은 레카미에 부인이 다비드가 그린 자기 초상화가 마음에 안들어
2
년후에 제라르에게 다시 부탁한 초상화이다.

*La Comtesse Regnault de Saint-Jean d'Angely"

*Caroline Murat and her Children 1808 "

*Constance Ossolinska Lubienska,1814*

그로(Baron Antoine-Jean Gros: 1771~1835)

*Bonaparte on the Arcole Bridge on 17 November 1796*

*Napolean at Jaffa,1804*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

*Napolean on the Battlefield of Eylau on 9 February 1807, 1808*

나폴레옹 1세는 1807 2 9 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러시아와 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역사적인 사실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공모를 통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공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에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날 전쟁터를 시찰하는 황제는 끔찍한 광경에
연민을 느낀다.  그는 부상당한 러시아 병사들을 간호하게 하여
그들은 황제의 인간미에 감격한다.  프랑스군은 멀리에서 야영을 하고
있고 황제는 열병하러 간다.   주제는 참혹한 전투의 흔적과
주동이 되었던 황제의 인간미를 동시에 표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모한 25명의 화가 중에서 당시 37세였던 그로의 작품이
수상하게되고 작품은 1808 관전에 전시되었다.  작가는 사실적이고
적절하게 황제를 중심으로 수행 막료들을 묘사했고 여러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여 개성을 부여하였다.

프루동(Pierre Paul Prud'hon: 1758~1823)

*Rutger Jan Schimmelpenninck with his Wife and Children, 1801-02*

*The Empress Josephine,1805*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는 동안, 프루동의 회화작품에
조세핀 황후는 상당한 호의를 보였으며, 이후에 마리-루이즈의
지대한 관심을 받기도 했던 대중적 화가, 피에르- 푸르동은
레오나르도 빈치와 코레지오의 주된 회화기법이었던 스푸마토
인물이나 사물의 윤곽선을 흐리게 처리해서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지는 착시현상과 명암대조를 극단적으로 부각시켜 하나의 주제만
명확히 나타내는 기법을 쫓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작품에 장막을
씌어 안개처럼 흐린 상태에서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작품 <조세핀 황후> 영국 낭만주의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개방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인물의 우울한 매력을 동시에 발산시키고
있다.  마티니크와 보아내 장군의 미망인 사이에서 태어난 조세핀
타셰 파졔리는 1796 보나파르트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나폴레옹 황제를 상속인으로 지정하지 않아 1809년에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이혼을 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를 하고
법전을 공포함과 동시에 1제정 시대를 열게 1804 다음
프루동은 말메종에 위치한 조세핀 황후 소유인 안뜰에서 포즈를
취한 그녀를 담아 <조세핀 황후>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Venus Bathing, 1810*

*The King of Rome,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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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9 신고전주의: 앵그르

   

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Selfportrait, 1858


David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 완성자라고 있다.
앵그르는 프랑스 남서부 몽토방 출생으로 무명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7
파리로 가서 다비드의 사사를 받게 된다. 앵그르가 화단에 입문하던
무렵의 프랑스 회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삼는 고전주의가 성행했다.
이같은 시대적인 배경과 맞물려 앵그르는 신고전주의 화풍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고, 다비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앵그르가 그린 고전적인 주제들은 다비드의 도상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완벽한 뎃생력과 감성을 갖춘 화가로서 다비드에게 결여되어 있는
'
우아함'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여인들의 초상이나 나체를 통해
드러나는 명쾌한 형태와 우아한 자태는 그만이 가질 있었던 독특한 표현의
영역이었다. 앵그르의 예술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정확한 소묘를 바탕으로
비례와 균형, 조화라는 고전적인 원칙들이 우아한 형태로 캔버스에 담겨
짐으로써, 고전파의 완성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소묘부분에서 앵그르는
미술의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소묘가 채색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
했던 그는 섬세한 , 풍부한 양감과 균형 잡힌 인체 구도의 신고전주의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해 나간다. 그는 다비드가 갖고 있던 정치성을 지워버리고
철저한 미의 구현에 매진하게 된다. 바로크 선상에서 이어진 푸생적 미의
계승자로서 루벤스 정신의 계승인 낭만주의에 맞선 마지막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앵그르의 작품 주제에 있어서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넘나들고 있다. 그가 지닌 고전주의적인 성향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공간의
연결과 조합, 투명하고 분리된 빛의 광선을 이용한 풍부한 리듬감 낭만주의
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따라서 신고전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게 비난과 눈총도
받아야 했고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낭만주의나, 혹은 신고전주의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일면을 토로하기도 한다.
"
() 공부하게. 그러면 자네는 훌륭한 화가가 것이야."
청년 드가에게 앵그르는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앵그르의 이러한
회화적 정신은 우선 드가에 의해 계승되었고, 인상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들라크르와가 색채에 의해서였다면, 앵그르는 형태에 의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었다. 형태에 대한 앵그르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본인의 진술에 나타나 있다. "진실에 의해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발견하지
않으면 된다. 고전은 창작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모델에 대해서는 크기의 관계를 살펴보라. 거기에는 전체의 성격이 있다.
또는 형태는 단순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힘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할하면 할수록 그만큼 아름다움에 약해진다. 사람들은 성격을
잡아내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의 형태 대신에 개의 작은
형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화가들이 그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완벽한 기교를 부러워하고 그의 권위를 존중했다.
역사화는 앵그르의 평생의 염원이었다. 초상화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실상 최후의 위대한 초상화가였다.
그만큼 내면적인 깊이와 외면의 정확성을 통일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제자들은 외관의 정확성에만 매달렸고 낭만주의자들의 그림은 화가의
사적인 감정이 이입되어 관심과 감동을 주는 반면 엄밀한 의미의 초상화는
아닌 것이다. 앵그르의 초상화는 외적 정확성 뿐만 아니라 모델의 내면적
깊이를 끌어내어 조합한다는 있었다. 이때문에 그를 신고전주의의
완성자라 부르면서도 낭만주의와의 절충주의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44세가 되던 유학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성숙되게 하는
중요한 토양이 된다. 그가 프랑스의 다른 고전파 화가들과 다른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의 고전주의 회화 양식은 형식에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인간적인 감성이 싸늘히 식어 있었지만, 앵그르에게는 현실에 대한
집착 뿐만 아니라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또한 놓치지 않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앵그르는 들라크르와의 그림에 나타난 극적인 명암과 소란한
움직임의 화풍을 경멸하면서도 실제로 그가 지닌 고전주의적인 성향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공간의 연결과 조합, 투명하고 분리된 빛의 광선을
이용한 풍부한 리듬감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또한 아름다움을 위해 인체를 다소 왜곡시키는데(그랑드 오달리스크)
역시 신고전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신고전주의자들을 지지하던 비평가들로부터 적지 않게 비난과
눈총을 받있다. 스승이었던 다비드와 확연하게 다른 작풍 때문에 '고딕풍'
이라던가 잃은 중국인 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생기있고 발랄한 감성이 담겨져 있는 앵그르의 작품은 화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그는 누구 보다도 자신의 재능을 믿었고, 화가의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무명의 지방 화가로 출발했던 그가 소위 '뜨기"까지는 매우 더딘
시간이 필요했다.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화가들로는 Matisse Picasso부터 Pop-Art
극사실주의자들까지 열거할 있다. 중요한 영향으로 그가 지닌 역량, 근대성
그리고 현실성 등을 내세울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동시대에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여러 화가의 이름을 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Bouguereau까지 연결시킬 있다.
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욕구는 항상 작품의 주된 모티브였다.
그의 눈은 늘상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었고 87세의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예찬은 예술혼으로 끊임없이 불타올랐다.
그는 미술사에서 르느와르나 피카소 다수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자신은 낭만주의적인 회화적 본능과 고전주의의 아카데믹한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생애를 마감했다.

*Marie-Francoise Beauregard, Madame Riviere,1806

*Mademoiselle Caroline Riviere,1806*

그림은 1806 살롱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리비에르 가족 중에
카톨린느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다. 앵그르는 리비에르 일가와 매우
친분 관계가 있어서, 리비에르와 그의 부인을 비롯해 카롤린느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15세의 카롤린느는 작품이 완성된 얼마 후에 짧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음영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밝은 분위기로 그려진 그림은
젊고 화사한 처녀의 아름다움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하얀 피부를 지닌 카롤린느의 목은 길게 뻗어
하얗게 받쳐입은 드레스에 더욱 어울리는 모습이다. 당시 상류사회
여인들의 멋스런 장식인 장갑이나 하얀 목도리를 허리부터 팔에 걸친
모습, 전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카롤린느의 시선 등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두껍지 않은 명쾌한 색채를 바탕으로 화면 구석구석
세밀한 필치로 묘사했기 때문에, 젊은 여인의 미적인 감각은 더욱 이상화
되고 있다. 카롤린느의 뒤로 펼쳐지는 강과 교회 , 낮은 나무 더미와
약간은 흐린 하늘의 풍경은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여인의 신비한 느낌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로 사용된 듯하다.
한편 카롤린느의 초상화가 있는 자세로 그려진 반면, 리비에르와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는 평온하고 안정된 구도를 지닌 앉은 자세로 그려져
있다. 이는 앵그르가 리비에르 가족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관찰해서
인물들을 배치했음을 있다.

*옥좌의 나폴레옹, 1806*

*Madame Antonia Devaucay de Nittis,1807*

*Bather of Valpincon(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그림은 앵그르가 로마로 유학을 떠난 2년이 지나 완성한 작품이다.
앵그르의 회화 기술은 로마에서 기초가 다져지고 신고전주의 화풍의 골격이
완성되는데, 세밀한 고전적 묘사로 이루어진 작품은 르네상스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정도이다.
그림은 욕실에 걸터앉은 젊은 전라 여인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등쪽에 밝은 광선을 비추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는 여인의 육체를
아름답게 이상화시키고 있다. 걸터앉은 침대에 잡힌 세밀한 주름들, 그리고
은밀한 목욕탕 내부를 가리기 위한 벨벳의 커튼이 만들어내는 주름들과 짙은
색채 등은 여인에게 쏟아지는 환한 빛과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형태의 입체적 표현, 치도 어긋나지 않은 세밀한 소묘
매끄러운 기교 등이 완벽한 구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앵그르는 전라의 여인을 그리는 일생을 바쳤는데, 초기 작품인 그림은
그의 회화 작업의 방향이 이미 확고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흡사 터번을 연상케하며, 침대보에 수놓아진 문양이나
커튼, 욕탕의 분위기는 터키의 풍속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가 말년에 <터키탕>이라는 작품을 남겼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있다.

*Alix-Genevieve de Seytres-Caumont, Comtesse de Tournon,1812*

*La Grand Odalisque,1814*

작품은 1819 살롱전에 출품되어 같은 유파인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혹독한 평가를 받았는데, <오달리스크> 그려진 인물의 왜곡된 인체
묘사가 원인이었다. 해부학적인 정확한 소묘의 추구는 르네상스 시대의
빈치 이래 계속 이어져 왔는데, 앵그르의 인체는 매너리즘 화풍을 연상할
만큼 길게 늘어진 척추와 좁은 어깨, 커다란 골반과 작은 발로 묘사된 기형적인
것이었다. 후에 그림은 현대적 양식에 고전적 전통이 결합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
오달리스크"라는 말은 터키 궁의 궁녀를 뜻하는 용어로, 앵그르는 20 년이
지난 후에도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작품을 만들 정도로 "오달리스크"
대해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의 주변에는 매트리스에 깔린
두터운 갈색 모피, 무겁게 늘어진 짙은 청색 커튼, 화려한 빛깔의 담뱃대
수증기를 뿜어내는 실내용 스토브, 황금색 담요 등이 둘러싸여 있다.
후궁들의 방을 뜻하는 하렘은 엄중한 감시와 금기의 장소로서 외부로부터
닫힌 공간인데, 공간에서 벗은 몸을 틀어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유혹적인 표정은 밀실로부터 개방된 바깥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한 신비
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당시는 프랑스가 근동 지방으로
세력을 뻗어나가는 시기였으며, 앵그르는 그림을 통해 터키 풍물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반영하는 소도구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Mme.De Senonnes,1814*

*Raphael and the Fornarina,1814*

*Lady Harriet Mary Montagu and Lady Catherine Caroline Montagu,1815*

*Portrait of Count Guriev,1821*

*Teresa Nogarola, Countess Apponyi,1823*

*Francoise Poncelle, Madame Leblanc,1823*

*Louis-Francois Bertin,1833*

초상화는 당시 데바 신문사 사장인 베르탱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의 인물은 억세고 정력적인 중년남자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약간 흩어진 머리털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넓은 이마로 비치는 밝은
빛은 코를 중심으로 뚜렷한 명암을 가르게 하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신감과 위엄이 엿보인다.
이처럼 억세게 표현된 얼굴에 비해 검은 색의 옷은 몸을 더욱 풍만하게 보이게
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과 검은 옷안에 받쳐입은 하얀 색의 정갈한
셔츠가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온화한 느낌을 발산한다. 이는 배경에
아무 것도 배치시키지를 않고, 어두운 분위기에 약간의 빛이 스며들게 채색한
효과 때문이다. 일종의 초사진(Super-Photograph)으로 보여질 만큼
초상화는 꾸밈없이 인물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습작으로 그려졌던 연필 소묘화에는 명쾌하고 확실한
인물의 특징만이 묘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유채 초상화에서는 강조와
비례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서 강렬하면서도 개성적인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와 같은 내면적인 울림과 외적인 정확한 묘사는 앵그르만이 표현할
있었던 재능이었다. 당시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이 외적으로 정확한
묘사에만 치중해야 했던 불안감은 앵그르가 보여주었던 내면의 감동이라는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Odalisque and Slave,1839*

*Roger and Angelica(Angelica Saved by Ruggiero), 1839*

*Louise de Broglie, Countesse d'Haussonville(도오송빌 백작 부인의 초상),1845*

*Hortense Reiset, Madame Reiset,1846*

*Betty de Rothschild, Baronne de Rothschild,1848*

*샤를르 7 대관식의 다르크,185154*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르크가 본격적으로 역사적 고찰을
받게 1840년대에, 위대한 프랑스 인들의 생애를 담은 『플루타르크
프랑세』라는 책에 앵그르는 다르크의 스케치화를 그려 넣은 적이 있었다.
19
세기 프랑스에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한 신고딕 양식의 교회와 같은
건축상의 치밀한 묘사와 경건하면서도 감각적인 크리스트교의 영광을 재현
하려는 목적으로, 앵그르는 오를레앙의 처녀 다르크를 통해 낭만적인 환상과
꿈을 표현하고 있다. 전설적인 여인인 다르크가 그림 중앙에 우뚝 있고
뒤에는 수도사와 신도들이 경배의 몸짓을 하고 있다. 샤를르 7세의 영광
스러운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이지만, 대관식을 주제로 삼지 않고 다르크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효과가 앞서 있다. 딱딱한 금속 갑옷의
질감은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손에 들고 있는 깃발과 머리
뒤에 입혀진 후광은 다르크의 이미지를 현실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닌
이상화된 신비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위에 놓여진 촛대며 여러 성물들
몸에 부착된 도끼며, , 철갑 마스크, 장갑 등의 세밀한 묘사는 실제로 만져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어둡고 차가운 색채감으로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으며,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편 그림 왼쪽 끝에 무관으로 묘사된
인물은 앵그르의 자화상이라고 전해진다.

*Caroline Maille, Madame Gonse,1852*

*Josephine-Eleonore-Marie-Pauline de Galard de Brassac de Bearn, Princesse de Broglie,1853*

*Marie-Clothilde-Ines de Foucauld, Madame Moitessier,1856*

*The Source(),1856*

앵그르의 작품들에는 여체(女體) 그린 작품들이 많다.
특히 앵그르는 여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을 정밀하면서도 이상화된
모습으로 재현하는 몰두하였다. <> 비롯하여 <터키탕>이나
<
오달리스크>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안젤리크를 구하는 로제> 등에
이르는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그의 회화 세계를 투영한다.
<
> 앵그르의 만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장식적인 아름다움과 새로운
관능미,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확한 데생은 앵그르가 고전주의의
중심적인 화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요소들이다.
물가에서 항아리를 지고 있는 풍만한 나신의 젊은 여인은 샘의 정령이다.
일부러 쏟아버리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는 물병에서는 자연의 근원을
뜻하는 맑은 물이 떨어지고 있다. 엷은 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여인의
표정과 몸은, 그의 초기 작품과는 달리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을 발한다.
이러한 특징은 앵그르 노년에 그의 작업을 도와 주었던 그의 제자,
발즈와 알렉상드르 데코프가 작품을 손보았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제기하게 한다. 작품이 처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820
앵그르가 40 피렌체에서였으며, 완성된 것은 1856 파리였다.
, 36년이라는 상당한 시간 간격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에서 보여주는 젊은 여인의 포즈는 그의 다른 작품 <비너스의 탄생>
에서도 반복해서 취해졌다.

*Venus Anadyomene*

*Delphine Ramel, Madame Ingres,1859*

*Le Bain Turc(터키 욕탕),1862*

젊은 시절에 앵그르는 <목욕하는 여인> 그린 이후로 욕탕과 여자에
관한 끊임없는 흥미와 관심을 보여왔는데, 그의 만년에는 <터키탕>이라는
대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터키 욕탕의 구상은 현실이 아닌 공상적인,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서 그린 것이다.
많은 전라의 여인들을 화면 배경에 모으고, 그림 앞에는 다섯 명의 여인을
배치시키고 있다. 많은 전라의 여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관능성을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 작품은, 보통의 네모난 캔버스가 아닌 원형으로 제작
되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라고 있다.
활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육체적 감각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소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없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앵그르가 고전파 회화를 추구하면서도 근대적 감각에 도전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그림에는, 수많은 전라의 여자들이 각자가 취할 있는 모든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의 누드가 만들어낼 있는 모든 포즈를
연구하던 앵그르의 작업들이 그림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앞쪽에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여자의 포즈가 가장 주의 깊게 묘사되어
있으며, 원근법에 따라 멀리 있는 여인들의 나부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형태만
묘사되었다. 그리고 왼쪽 욕탕 속에 있는 여자도 앵그르가 그림의 구도를 위해
나중에 삽입한 것이다. 그림은 <오달리스크> 더불어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동방 문화로의 경도" 나타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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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3-1- 바로크 네덜란드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히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레이덴
대학에 들어갔으나, 수개월만에 화가를 지망하여 자퇴하였다. 그후 라이덴의
화가 J. 스와넨브르크에게 사사받았으며 이어서 암스테르담에서 P. 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 라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르프 박사의 해부]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1634
명문가의 사스키아 오이렌 부르흐와 결혼하였으며 당시의 미술
세계시장 이라고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자 하는 바램이 절실해졌고 종교나 신화적인 소재나
자화상류의 작품이 많아졌다.
1642
년의 명작 [야경(夜警)] 그를 세속적 명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 주문에 의한 단체
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 초상화에 만족해하지
않고,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으나
사람들로부터 예술의 깊이를 이해받지 못하였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 속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때부터
라고 있다. 죽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티투스의 성장과
1645
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케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였고,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의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결국 1656년에 파산
선고를 받아 살고 있던 저택도, 그의 예술적 영감을 끝없이 자극해주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
헨드리케가 죽고, 1668년에는 유일한 아들인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죽었다. 그가 죽을 남긴 것이라고는 벌과 그림 도구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 에칭, 소묘,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유화 600
에칭 300 , 소묘 수백 등이 있다. 특히 종교화의 경우 매우 장엄한
효과를 살린 작품이 많으며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 100) 그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설혹 유화를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에칭의 모든 기술이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에서 최고화가의 사람으로 꼽을 있을 것이다.
더구나, 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상의 모습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특유의 명암법에서 기인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빛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색채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를 일컬어 '혼의 화가', '명암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작품의 대상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만, 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최대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 색이나 모양이 모두 자체이며, 명암을 통해 생명의 흐름을 표현했다.
'
빛의 미술가'라고도 불리우는 렘브란트의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하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또한 회화사에서 렘브란트만큼 심오하게, 그리고 그만큼 불안과 고뇌를 지니고
인간과 세계, 화가와 , 순간의 언어와 영원의 표현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
화가는 없다. 인생과 작품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화가들이 있는데
렘브란트가 그러했다. 그는 비범한 투시력과 '명암에 대한 최고의 지성' 지닌
빛과 어둠을 훔친 화가였다.

*The Music Party, 1626*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1630*

*A Scholar,1631*

*The Anatomy Lecture of Dr. Nicolaes Tulp(튈프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

*Artemis,1634*

*Saskia as Flora, 1634

*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1635*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는 동안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해석을 대별하면 다음의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렘브란트의 신혼 생활의 행복한 모습을 그린 .
둘째, 성서(聖書) 나오는 방탕아의 역할을 스스로 연기하고 있는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부부.
셋째, 자만심에 대한 경종의 우의(愚意) 담긴 .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어찌 됐든 작품은 렘브란트 자신과 사스키아를 모델로 다분히 우의적인
2
초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림에서는 의기 양양한 렘브란트가
사스키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이쪽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고 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에는 공작이 놓여 있다.
네덜란드의 도덕적 우의(寓意) 의하면 술잔은 호의호식을, 공작은 오만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렘브란트가 차고 있는 칼도 때의 신분으로서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Portrait of Saskia with a Flower, 1641*

*The Feast of Belshazzar,1635*

*Danae, 1636-47*

*Self-Portrait,1640*

*The company of Frans Banning Cock preparing to march out

known as the Nightwatch(
야경),1642*

*The Little Children Being Brought to Jesus

("The 100 Guilder Print")Completed,1647-49*

렘브란트의 예술을 이해하는 있어 빼놓을 없는 것이 그의 소묘와
동판화이다. 소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초벌 그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렘브란트의 그것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되었으나 독특한
필치는 일단 인정하더라도 그의 동판화는 고금을 통해서 알브레트 뒤러, 고야와
함께 동판화의 3 거장의 한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판화가 필요로 하는
정교한 기법적 훈련이 렘브란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흑백의
대비의 미묘한 효과는 렘브란트의 독특한 명암법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판화 기법을 단순한 복사(複寫) 방법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 형태로 정립시킨 판화영역에 있어서의
혁신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엠마우스의 순례자들,1648*

렘브란트는 그리스도가 명의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담긴
"
엠마우스의 저녁식사"라는 테마를 즐겨 그렸다. 그가 1648년에 그린
<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신성한 그리스도의 위엄으로 가득 있다.
레오나르도 빈치나 티치아노, 베로네제와 같은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들의
회화구성이 그대로 스며있는 그림은, 도상해석을 요구하는 긴장감이 풍겨
나온다. 그림의 중심축을 이루는 그리스도가 화면 왼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한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날카로운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스도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그가 죽음의 승리자라는 암시를
나타낸다. 예수에게 건네지는 포도주 잔은 비어있고 조각으로 잘려진 양의
머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렘브란트는 인간성과 깊이 있는 종교적 진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당대의 모든 종교화의 전통을 혁신적으로
바꾸어버렸다.

*Bathsheba at Her Bath,1654*

*Jan Six,1654*

*가죽 벗긴 ,1655*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들은 빚을 갚기 위해 제작된 그림들이 상당히 많았다.
심지어 작품이 그려지기도 전에 먼저 경매가 붙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의 60
점의 자화상 몇몇 작품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와는 다른 제재를
담은 <가죽 벗긴 > 독특한 소재와 강렬한 사실감, 함축적인 은유 등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가죽이 꺼풀 벗겨진 소의 다리는 나무 받침대에 묶여 있다.
도축장 내부 풍경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한 어두운 공간에는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죽은 소가 매달려 있다. 약간 뒤쪽 문가에는 모자를 젊은
여인이 상체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는 자세로 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벗겨진 소는 마치 십자가에 박힌 예수를 연상하게 만드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 색채 또한 너무나 강렬해서 빛이 쏘여지는 짐승의 밝게 빛나는 몸통에
흐르는 핏자국과 돌출된 뼈는 어두운 외부 배경과 대비되면서 극도의
자연주의적 사실감을 획득한다.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되는 가축"이라는
주제는 서양 미술사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단골 메뉴였는데, 후에
고야의 작품 <죽은 닭들>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렘브란트의 <가죽 벗긴 > 이러한 주제의 시조라고 만큼 당시에는
독창적인 소재였다.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비참하게 벗겨진 죽은 동물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간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에 대한
고발을 냉정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뛰어나게 재현하고 있다.

*The Artist's Son Titus, 1657*

*Portrait of a Lady with an Ostrich-Feather Fan,1660*

*Portrait of the Artist at His Easel,1660*

렘브란트는 생애에 솔직하고 자기 분석적인 60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작품은 렘브란트의 궁핍하고 비참했던 말년 즈음인 1660년에 제작된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있는 자화상이다.
말년에 그린 대부분의 자화상들은 소박한 위엄과 번민에 가득 인간의
솔직함이 감동적으로 드러난다. 아내와 자식, 모든 재산을 잃은 렘브란트는
자화상 속에서 아름답게 꾸며진 얼굴이 아니다. 자신의 못생기고 추한 부분을
성실하고 빈틈없이 관찰하면서도, 격한 감정을 절제된 붓끝으로 화폭에
날카롭고 침착하게 담고 있다. 렘브란트는 오른손에 붓으로 팔레트에
물감을 묻히는 중이다. 화면 오른쪽에 간신히 빛의 윤곽만으로 드러난
캔버스는 어두운 배경 속에 묻혀 있다.
모자를 렘브란트는 마치 작업중에 찾아온 누군가를 보고 있는 자세를
취했다. 분명하지 않은 윤곽선으로 묘사된 얼굴은 특징적인 부분만 강하게
부각시켜, 렘브란트의 추하고 못생긴 얼굴이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강렬한 명암 대조 효과가 사용된 가운데 무겁고 짙은 농도의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복잡한 인간 표정의 없는 내면이 진실하게 그림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림은 거울을 앞에 두고 거기에 비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담는 구도로 설정되어 있다.

*The Syndics of the Clothmaker's Guild (The Staalmeesters),1662*

*The Jewish Bride (The Loving Couple),1666*

*Self-Portrait,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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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2 바로크 –카라바지오, 루벤스

   

5. 바로크 미술(Baroque Art: 왕실 중심의 동적인 17세기 미술 양식)

"
바로크"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조화된 이성적인
표현에 비해, 강한 왕권과 함께 나타난 거칠고 과장된 남성 경향의 17세기
미술양식이다.

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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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원뜻은 지나치다라는 남용의 뜻이지만,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것에서 나온 괴상하고 과장된 형태를 뜻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와 비교해서
바로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빛나는 색채, 음영과 질감의 풍부한
대비 효과, 자유롭고 표현적인 붓질 등으로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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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미술사가 H. 뵐플린은 19세기의 평가에 나타나는
양식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했다.
그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의 타락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이어서 양자는 근대미술에서의 2
정점을 형성하는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 ,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에스파냐로 번져 나갔고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확대되었다.
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적 도상(圖像) 일신하고 종교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정(均整완결성 등에 대하여
경탄과 현혹(眩惑) 지향하여 양감(量感광채·동감(動感)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飛翔)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복장 표현
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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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는 이미 16세기에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품이나 틴토레토의 회화에서도
엿보이는데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공존하면서 16세기 말엽 로마에
등장한다. 종교건축에 있어서의 C.마데르나와 G.베르니니의 작품(산피에트로
대성당의 정면부 주랑, F.보로미니의 생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교회당)
조각에서 베르니니의 작품인 산피에트로대성당 고해단(告解壇) 천개(天蓋)
유물궤(遺物櫃), 나보나 광장의 분수, 종교적 공상의 세계를 그린 A.포초의
천장화(天障畵)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바로크는 이탈리아 각지에 전파되어 토리노의 () 신도네 교회 나폴리의
카세르테궁(),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 델라살루테성당과 G.티에폴로의 회화
등을 만들어냈다. 북방 바로크의 중심인 빈에는 마르티넬리, A.힐데브란트 등의
궁전·교회 건축, B.페르모저 등의 조각, 모르베르슈의 회화가 있다.
뮌헨·드레스덴·프라하도 중심지에 포함된다.
에스파냐에서는 바로크가 전통적인 추리게레스코 양식과 결합하여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구제원, 그라나다의 샤르트르회()성당 등을 꼽을 있는데
멕시코·브라질·콜롬비아·페루의 식민지에서 독자적인 장식양식을 낳았다.
벨기에에서는 P.루벤스의 회화와, 플랑드르 고딕과 건축 양식에서 있다.
명석함과 중용을 국민정신으로 하는 17세기의 프랑스도 바로크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나, C.비뇽, S.부에, J.블랑샤르의 회화 활동도 시험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오늘날 바로크는 좁은 의미의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넓은 뜻의 문화양식으로서
다른 시대와 장르에도 확대 적용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말기, 중세 말의 후기
고딕, 1900년대의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에도 적용되었다.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렛지오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 풍요로움이
비롯된다. 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초로,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의 종교적 리얼리즘과 강한 명암의 대비를 바탕으로 인간의 격정을 힘차게
표현한 사실적 화풍은 기성의 화가로부터 반발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젊은
예술가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음으로써 새로이 전개하려고 하는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1584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로마로 가서
처음에는 빈곤과 병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추기경 몬테의
후원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 양식을 확립
하였는데,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近代寫實) 길을 개척하였다.
금색을 바탕으로 밝은 색의 조화로써 구성된 초기 작품에서 격하게 억제된
빛으로 조명된 만년의 음울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은 언제나 빛과
형상에 대한 근본원칙을 확립하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조형 전통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F.할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초기의
벨라스케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유럽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화풍은 제자인 에스파냐의 리베라를 통해 살바토르
로자에게 계승되었다.

*The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1596*

*The Fortune Teller, 1596-97*

*Rest on Flight to Egypt, 1596-97*

*Bacchus,1597*

*St Catherine of Alexandria, 1598*

*Martha and Mary Magdalene, 1598*

*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

유디트는 이스라엘 베틀리아에 살았던 여인이다. 앗시리아군의 사령관
홀로페르네스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서반 세계를 모두 정복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저항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베트룰리아를 포위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과부인
유디트가 나선다.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앗시리아군에 거짓 투항을 한다.
그리하여 술에 거나하게 취해 추태를 부리는 적장의 목을 유디트가 단칼에 베어
버린다. 여기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The Calling of Saint Matthe,1599-1600*

작품은 " 마태의 생애" 주제로 삼아 연작으로 만들어진 작품
<
마태와 천사> < 마태의 부르심> < 마태의 순교> 하나인
<
마태의 부르심>이다. 화면의 오른쪽으로 그리스도와 사도가 다가오고
있으며, 동료들과 탁자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는 이해의 몸짓으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다. 사도의 몸에 가려 옆얼굴만 비치는 그리스도의 손은 세리
마태로 향하고 있어서, 무언가 절박하면서도 엄숙한 메시지가 전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서 정확한 대각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강한 계시의 빛이 그리스도의 머리 위를 통과하면서 인물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데, 빛으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각각의 표정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있다.
작품에는 카라바조가 창안해낸 "테네브리즘(Tenebrism)", 실체만을
조명하는 기법이 적용되었다. 어둠과 빛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어둠에 숨어
있던 세리 마태가 돈을 세는 장면, 사울이 찼던 칼이며 깃털 달린 모자, 그리고
인물들의 감춰진 표정들까지 드러나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실내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 속에서 서치라이트처럼 비추는 빛의
효과는, 이제 십자가에 박힐 운명을 지니게 그리스도의 절박하면서도
신성한 부르심을 하나의 드라마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Supper at Emmaus,1600-1601*

*Amor Vincit Omnia,1601-02*

*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1602>

*동정녀 마리아의 임종,160506*

작품은 당대의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던 걸작이다.
루벤스는 카라바조의 회화 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카라바조의 강렬한
빛의 사용과 극적인 사실감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이러한 기법을 도입
하기도 했다.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주제로 삼아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림의 실제 모델은 티베르 강에서 빠져 자살을 로마 소녀였다.
회화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성모상은 경건하고 신비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에, 카라바조는 부풀어오른 몸과 발이 드러난 평범한 처녀를
성모로 설정하였다. 이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카라바조의 극적인 사실적 자연주의는 하나의 주제를 인물에 집중해서
투영하고자 강렬한 빛으로 무대를 설정하고, 뒷배경들은 레오나르도풍의
"
스푸마토 기법"처럼 멀리 희미해지거나 어둡게 처리한다. 작품에서도 죽은
성모의 육체와 바로 앞에서 슬프게 우는 여자와 사도의 표정만이 빛에 의해
드러나고,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신앙의 세계가 지배하던 16세기 사회를 완강히 거부하며 속세의
신앙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했다는 것을 <성모의 죽음> 통해서 다시
확인할 있다. 성모를 지켜보는 머리가 벗겨진 사도를 통해서만이 죽은자가
성모라는 것을 확인해주면서 카라바조는 위선적인 종교의 권위나 맹신에 대한
저항을 회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루벤스는 북유럽 바로크의 주도적 인물로 회화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건축가
베르니니보다 훨씬 지대했다. 그는 플랑드르 어느 매너리스트에게 훈련받았고
고전,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을 두루 섭렵하고 당대의 카라바조, 카라치의 예술을
역시 흡수했다. 그는 생애에 모든 영예를 누리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소장품도 최고의 것이었으며 때로는 외교사절로 활약하며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와 같은 배경의 자신감은 왕과 같은 품위를 지닌 [자화상]
에서 반영되고 여유 있는 생활과 인품은 정신적인 면에서 휴머니즘과 평화를
주도하려는</